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의 젊은이들
주제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 19:9).
시작하는 말
긴급 상황
대형 초음속 여객기가 승객을 가득 태우고 전속력으로 날고 있다. 여러분이 이 여객기에 탑승한 승객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제 여러 시간이 지나 목적지에 가까웠다고 생각할 즈음에 갑자기 기장의 긴장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친애하는 승객 여러분, 긴급 상황을 알려 드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일찍이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빠르고 가장 호화로운 여객기에 탑승했으며 우리는 지금 어마어마한 속도로 비행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비행기는 지금 계기 고장으로 방향을 잃었고 항로를 벗어난 채 초음속으로 비행하고 있습니다. 연료는 거의 바닥이 났으며, 산소와 음료수, 기내 음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물이 부족하므로 음료수를 절약해 주십시오. 산소도 부족하므로 호흡을 자제해 주십시오.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우 탄트(U Thant)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인류가 불확실한 방향으로 가속적인 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과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다시 불안하고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76억의 인류를 탑승시킨 채 공전을 계속하고 있는 행성 지구의 오늘날 상황이다. 우리가 바로 그 승객들인 것이다. 과연 21세기에 들어선 지구의 역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어디서, 누구에게서, 이 긴급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다니엘서 연구의 중요성
미래를 미리 아는 일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시공을 초월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미래를 아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두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을 창조하는 일(사 40:25~26)과 미래를 아는 것이다(단 2:29).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 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사 41:22~23).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세상의 미래가 육신으로 옷 입으신 하나님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설교인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되어 있다. ‘감람산 설교’로 알려진 이 마지막 설교의 내용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3~8, 14).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설교의 내용은 사람들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세상의 “마지막” 곧 “끝”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세상의 끝을 알 수 있으며 어떤 단서를 주셨는가?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 24:15).
누구든지 세상의 마지막에 관하여 알기를 원한다면 선지자 다니엘이 쓴 다니엘서를 읽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당신의 마지막 설교에서 연구하도록 친히 요구하신 유일한 책이 다니엘서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다니엘서 연구의 중요성은 확실해진다.
다니엘서는 모두 12장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에 따라 1장부터 6장까지의 역사적 부분과 7장부터 12장까지의 예언적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우리는 먼저 교훈으로 가득 찬 역사적 부분부터 연구를 시작한 후에 흥미진진한 예언적 부분을 연구할 것이다.
마지막에 관한 책 다니엘
바벨론과 이스라엘의 역사
창조후 1,600여 년 만에 세상을 휩쓴 파멸적인 홍수를 다시는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들은 불신했다. 그리하여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의 영도 아래 사람들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바벨탑을 쌓고 그 곳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역사를 계속하였다. 기원전 18세기쯤에는 그 곳에 아모리족의 함무라비가 다스린 구 바벨론(바빌로니아)이 3세기 동안 왕성했고 그 다음에는 티그리스 강 유역에 자리 잡은 앗시리아가 다스리다가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 갈대아족의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셈족의 나라 신 바벨론(바빌로니아)이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기원전 18세기 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지역인 유프라테스강 하류 갈대아 우르에 살던 셈족의 족장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지금의 이스라엘이 차지한 팔레스틴으로 이주시키셔서 기원전 11세기에 마침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할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을 세우게 하셨다. 사울 왕을 시작으로, 다윗 왕, 솔로몬 왕으로 이어지는 통일왕국시대가 120년간 (1050~931년 BC) 계속되다가 솔로몬왕의 사후에는 북방의 이스라엘과 남방의 유다로 분리되어 남북왕조시대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버린 북방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였고, 남방 유다 역시 하나님께 불순종을 거듭하다가 신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의 침략과 포로 끝에 기원전 586년 멸망을 당하였으며 백성들은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포로가 기원전 605년에 있었는데 이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대 왕족, 청년 다니엘과 다른 세 젊은이를 바벨론으로 잡아갔으며 그들은 거기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 가운데 다니엘서의 주인공인 다니엘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다니엘서를 기록함과 동시에 바벨론제국 이후 페르샤 시대까지 탁월한 정치가로서 그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다니엘서는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관한 책이다. “마지막 때”(the time of the end)라는 말이 성경 전체에서 5번 나오는데 모두 다니엘서에만 기록되어 있다(단 8:17; 11:35, 40; 12:4, 9). 다니엘서와 마지막 때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기를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라고 하였다. 이것은 2,300주야 예언(단 8:14)이 “마지막 때”가 되기 전까지는 아예 봉하여 두었다가 갑자기 사람의 지식이 증가하고 교통이 빨라지기 시작하는 “마지막 때”가 되면 개봉되어 깨닫게 될 것이라는 단서가 붙여진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 때가 언제부터 시작되는지는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세상의 역사에 관한 예언
주제절 :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단 2:28)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여행마다 출발지가 있고 목적지가 있듯이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역사의 시작인 생일이나 출생지도 우리 스스로가 깨달은 것이 아니고 모두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이름까지도 모두 부모님이 지어 주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역사도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외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이 낱낱이 적혀 있는 책이 바로 하나님이 저자이신 성경의 처음 책 창세기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처음으로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창 5:1~2). 그리고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고 기록하였다(창 2:8). 그렇다면 이 에덴동산은 어디인가?창세기에는 이 에덴동산에서 시작되는 강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가운데 “유프라테스강”과 “힛데겔강”(티그리스강의 히브리어 이름)이 나온다(창 2:14).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함께 있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방인 것이 분명하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의 뜻은 “강 사이” 곧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의 법칙인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죄를 범하였고, 죽음을 선고받아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기게 되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창조 후 1,600여 년이 지날 때쯤 온갖 부도덕과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온 세상은 홍수로 파멸되었다. 그 결과로 석탄과 석유 등 지하자원이 생성되었으며 각종 화석이 수없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큰 배[방주]를 지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아의 여덟 식구인데 세 아들의 이름이 셈, 함, 야벳으로 셈족, 함족, 인도-유럽족의 조상이 되어 지금의 인종으로 퍼졌다. 그 자손들은 또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바벨탑을 쌓으면서 저항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혼란하게 하심으로 그 공사를 중단시키시고 결국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셨다.그중 한 무리는 남하하여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을 시작했고, 또 다른 무리는 동진하면서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에 이르러 인도 문명을 발생시켰으며 더 나아가다가 황하에 이르러 고대 중국 문명을 정착시켰다. 일단의 무리는 계속 동진하여 베링 해협을 건너 고대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 되었다. 이처럼 세상의 역사는 성경의 내용과 일치할 뿐 아니라 성경의 기록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 그 누구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마음은 여전히 시원하지 않다. 과학의 발달로 정보는 홍수처럼 몰려와도 미래는 도무지 밝아지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늘 불안하고 답답한 오늘이다.
고삐 놓친 도덕, 가치 잃은 예술, 지조 없는 신앙, 휩쓰는 술과 담배 그리고 마약 문화, 넘치는 쾌락주의, 거세어지는 이상기후와 천재지변, 망가져 가는 생태환경. 그토록 가치 있고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소원했지만, 이제는 기다리다 지쳐 버린 심정이다. 바라볼 데가 없고 기다릴 것이 없는 현실이다. 이것이 전부인가, 이것이 대답인가. 아니다. 다른 대답이 있다. 다른 대답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 배경
다니엘과 세 친구가 사로잡혀 온 유다의 제1차 포로가 있은 기원전 605년 이후 3년째 되는 기원전 603년은 그들의 바벨론 교육 과정이 마쳐지는 해였다. 신 바빌로니아 종주국이었던 앗시리아를 기원전 612년 멸망시켰고, 주변의 강대국들인 이집트와 메대, 리디아를 제패했으며, 페니키아와 유다도 차례로 복종시켰다.
이리하여 기원전 6세기 근동 세계의 최강국이 된 바벨론의 젊은 대왕 느부갓네살은 아버지 나보포랏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 이전처럼 다시는 망하지 아니할 만세 왕국을 꿈꾸고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황금 꿈은 착실히 성취되어 가고 있었다.
어떤 갑작스러운 일이 느부갓네살 왕을 잠 못 이루게 했는가?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 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단 2:1)
젊은 나이에 만세 왕국을 꿈꾸고 있던 느부갓네살 왕은 그의 재위 2년 어느 날 그의 이러한 황금 꿈을 산산조각 내는 악몽을 꾸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것이 자신의 운명에 관계된 악몽이라는 인상만 남긴 채 그 꿈을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이제 그는 그 꿈을 찾아야 했고, 그리고 그 꿈의 바른 해석을 구해야 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를 불렀는가?
번민하며 시달리던 왕은 즉시 전문가들로 구성된 보좌관 회의를 소집하고 그의 잊어버린 꿈을 찾을 것과 그 해석을 요청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발달된 과학으로도 미래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때 불려온 사름들 중에는 대학교수는 물론 별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점성술사도 있었고 심지어는 불안을 잊게 하는 약물을 취급하는 약사들도 있었다. “갈대아”는 신 바빌로니아를 일으킨 “아람”족속의 이름으로 바벨론의 지배 계급이었다. 1988년 5월 16일 시사주간지 「타임(TIME)」지는 특별한 내용으로 세상의 이목을 글었다. 표지의 사진은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 위에 수심에 찬 표정을 한 레이건 대통령 부인 낸시 여사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쳐다보는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내용인즉, 레이건 대통령이 저격을 당한 이후 불안해진 영부인이 공식 행사를 위한 남편의 출입은 물론 국제회의 일정까지도 모두 여성 점성술사인 퀴글리(J. Quigley)에게 일일이 물어서 결정했다는 충격적인 기사였다. 뿐만 아니라 레이건 대통령은 화액을 피하기 위해 부적까지 지니고 다녔으며 여러 다른 미신도 행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삼천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이 레이건처럼 점성술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불안한 현실을 달래기 위한 마약 사용과 점성술 행사는 지금도 2,500년 전의 느부갓네살 때와 다름없다.
어떠한 긴급 상황이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이르렀는가?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왕의 명령이 내리매 박사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 동무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단 2:11~13).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인간도 할 수 없는 일을 요청 받은 학자들과 보좌관들의 변명에 좌절하고 실망한 전제군주의 분노가 폭발하여 그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얼마 전 보좌관으로 발탁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처럼 긴박한 사태에 대해 다니엘과 세 친구는 어떻게 대처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단 2:17~19).
다니엘은 즉시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그것이 위기가 아니라 참 하나님의 존재를 바벨론에 선포하는 최선의 기회가 될 줄로 확신했다. 그리하여 세 친구와 더불어 이 비상사태에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목숨을 건 열렬한 기도를 드렸다. 기도는 응답되었고 마침내 왕의 잊혀진 꿈과 그 해석이 계시를 통해 다니엘에게 낱낱이 전달되었다.
밝혀진 세상의 미래
다니엘은 이 놀라운 사실을 어떻게 왕에게 설명했는가?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장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 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 게 하셨사오며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 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단 2:27~30).
다니엘은 이러한 일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There is a God in heaven)”의 존재를 먼저 선포했다. 그리고 왕이 그것을 알기 위해 그토록 번민하고 있는 문제가 세상의 “장래 일”임을 밝혔다. 그리고 이 일은 자신의 지혜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다시 분명히 했다.
왕이 잊어버린 꿈의 내용은 무엇인가?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 2:31~33).
꿈의 내용인즉 왕이 그토록 알기를 원하던 세상의 장래를 하나님께서 꿈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인데, 그 당시 꿈은 하나님이 사람과 의사를 소통하는 방법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장래가 금, 은, 동, 철, 진흙과 철이 섞여 이루어진 거대한 신상의 모습 속에 나타난 것이다.
신상의 금 머리는 어느 나라라고 해석했으며, 실제의 역사는 그 해석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앞에 진술하리이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단 2:36~38).
하나님의 왕국
자칫 일어나기만 하면 졸지에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핵전쟁의 공포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세상 역사는 사람의 손이 조작하는 핵무기로 끝나지 아니하고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인 예수 그리스도의 갑작스러운 재림으로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돌이 자신임을 천명하시면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눅 20:18)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단 2:45).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예언된 세상의 “장래 일”에 관한 내용과 해석은 다니엘의 선언처럼 “참되고···확실”함이 역사를 통해 이미 입증되었다. 이제 남은 사건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의 획기적인 수립이다.
세상의 장래에 관한 해석을 들은 느부갓네살왕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이에 느부갓네살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단 2:46, 47).
너무나도 분명한 꿈의 내용과 해석에 대해 깊은 감명과 확신을 갖게 된 왕은 다니엘을 통하여 나타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즉시 엎드려 경배했으며 다니엘을 왕의 수석 고문인 “박사들의 어른”으로 삼았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도지사로 임명했다 (단 2:48, 49).
확실한 재림과 준비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단 2:45).
2,500년 전 다니엘서에 예언된 세상의 장래는 빈틈없이 성취되어 지금은 역사의 기록이 되었다. 이제 남은 예언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고 떠낸 돌의 출현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의 수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 성경에만 300여 번이나 기록된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의 철석같은 약속이며, 성경의 결론이기도 하다(계 22:20). 재림이 없다면 수천 년간 믿어 온 하나님과 성경은 모두 거짓인 셈이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을 낱낱이 이루시고 2천년전 분명히 초림하셨던 것처럼 재림에 관한 신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도 분명히 오실 것이다.
날마다 백여 종의 종이 멸절되고 있을 만큼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지구 환경의 파괴와 오염, 인구의 급증, 자원의 고갈과 인간의 부도덕과 파멸적인 핵군비 경쟁···그대로 방치되면, 학자들의 말처럼 멀지 않아 인류는 자멸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멸하기 전, 세상이 파멸되기 전,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다. 죄의 결과인 죽음과 질병, 슬픔과 고통을 생명과 환희, 희망과 행복으로 바꾸기 위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계 22:20)는 성경의 마지막 약속은 끝내 지켜질 것이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 세상의 종말은 각 사람의 선택에 따라 영원한 희망일 수도 있고 최대의 비극일 수도 있다. 그것은 재림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내가 나의 구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대답은 분명하지 않은가.
신앙의 자유와 진정한 예배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 최초로 이르러 온 유혹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창 3:5)는 사단의 속삭임이었다. 사람은 모두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중심과 자신의 품위와 인격을 지키려는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능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기억할 때는 자신의 인격을 향상시키는 관건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표현인 예배를 부인하고 거절할 때는 이러한 인간의 자존심은 자기숭배로 변질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두게 됨으로써 자신이 거짓 신인 우상이 되고 만다. 그것이 곧 사단의 정신이요, 사단의 종교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면 자신이 곧 하나님이 된다. 그것은 모든 무신론적인 독재자들과 세속적인 위인들의 자기 신격화 현상이다. 느부갓네살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어떤 신상을 세우도록 했는가?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단 3:1).
다니엘서 2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세상의 장래를 나타내 보이신 두려운 신상을 보았다. 그 결과로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 경배했다. 그런데 3장에서 우리는 반대로 느부갓네살 왕이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에 경배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본다. 3장에서 우리는 참된 신앙의 자유와 진정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를 배우게 된다. 2장의 사건이 있은 후 여러 해가 지나 왕권이 확고해진 때 느부갓네살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두라(지금의 나르 두라) 평지에 받침대를 포함하여 높이 60규빗(103피트), 폭이 6규빗(10피트)이나 되는 거대한 신상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국립 관현악단을 초청한 가운데 화려한 제막식을 올리고 있었다.
제막식에는 누가 참석했는가?
“이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단 3:3).
참석 범위와 의식의 규모로 볼 때 금 신상은 국교의 대상인 국신의 위치에 있었으며 제막식에는 도지사였던 유다의 세 젊은이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왕의 수석 고문이었던 다니엘은 왕이 허락한 어떤 사유로 불참했다.
금 신상을 세운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이러한 목적에 어긋날 때 어떠한 형벌이 선언되었는가?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하매” (단 3:5, 6).
금 신상은 단순한 조각품이 아니라 사단이 그 배후 세력인 바벨론의 신들을 경배하게 할 목적으로 건립한 것이었고 제막식은 이러한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의식이었다. 신상에게 절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풀무불에 던져 넣는 극형에 처해졌다. 느부갓네살은 왜 이처럼 엄청난 일을 계획했을까? 다니엘이 왕의 꿈에 나타났던 2장의 신상을 해석할 때,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라고 선언했었다. 머리 부분에서 그의 나라가 끝난다는 해석을 그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이 해석을 바꾸어 바벨론을 만세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발끝까지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들게 했으며 모든 사람들을 절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신격화했다. 제막식은 바벨론의 흉몽을 길몽으로 바꾸기 위한 화려한 푸닥거리였다. 그것은 과거 로마제국이 황제를 신격화하여 황제예배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을 원형극장에 던져 사자 밥이 되게 한 것이나 일본의 천황숭배인 신사참배와 같은 목적으로 인간의 신앙 양심을 짓밟는 명백한 우상숭배였다.
누가 감히 왕명을 어기고 금 신상에 경배하기를 거절했는가?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단 3:12).
신상 참배를 알리는 국립 관현악단의 장엄한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참석한 모든 군주들과 고관들이 일제히 엎드려 경배했으나 도지사의 신분으로 참석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장승처럼 태연하게 서 있었다. 이 사실은 즉시 시기심에 가득 찬 바벨론의 지도급 인사들에 의해 왕에게 보고되었다. 이들은 지난날 왕의 꿈을 찾아 해석하지 못함으로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으나 다니엘의 호소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그 은혜를 왕에 대한 충성을 빙자하여 이렇게 배신으로 갚은 것이다. 사단이 조종하는 인종과 종교와 명예에 대한 살인적인 편견과 시기가 발동된 것이다.
세 젊은이의 뜻밖의 행동에 대한 왕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 3:14, 15).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바벨론의 신들에게 경배하지 않는 가장 불경한 행위인 동시에 왕의 명령을 거스르는 중죄임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평소에 다니엘과 세 친구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왕은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어 그들을 설득하는 한편 거절할 경우 가장 가혹한 방법으로 처형하겠다는 왕의 결단을 통고했다.
왕의 선언과 세 젊은이의 신앙 고백 가운데 나타난 이 사건의 핵심이 되는 주제는 무엇인가?
느부갓네살 :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 3:15).
세 젊은이 :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단 3:16, 17).
금 신상의 제막식에서 엎드려 절하는 문제는 단순한 의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섬기는 바벨론의 신과 유다의 세 젊은이가 섬기는 하나님과의 대결임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어느 신이 참 하나님인가를 확증해야 하는 최고의 주제와 사람이 어느 신에게 최선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판가름해야 하는 인간의 가장 엄숙한 선택이었다.
느부갓네살이 죽음으로 위협하며 경배를 강요한 바벨론의 신은 누구인가?
바벨론의 주신의 칭호는 “벨”(Bel)로서 이름은 마르둑(Marduk)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의 주신 “바알”(Baal)과 같은 “주”(lord)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의 전설에 의하면 마르둑은 사람과 동물을 창조하여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살 게 한 창조의 신으로 자신의 보좌는 북극 하늘 높은 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하늘에서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내쫓겨 마침내 사단이 된 성경의 악한 천사 루스벨(Lucifer)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세상의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참 하나님이시다.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켜 추방당한 사단의 유혹에 빠져, 범죄 함으로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분이 바로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리하여 유다의 세 젊은이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로 대표된 극한의 예배 논쟁은 하나님과 사단과의 대결, 선과 악의 대쟁투임이 확실해졌다.
유대인 세 젊은이는 왜 금 신상에게 절하는 일을 거부했으며 하나님만 경배하기로 작정했는가?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하더라”(계 14:7).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5).
부모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은 생명을 주고받은 특별한 관계로서 자식을 낳아서 사랑과 희생으로 기른 사람만이 부모이며 부모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부모만이 자녀들로부터 최고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인 것이다. 그처럼 아무나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세상을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창조하신 창조주만이 하나님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하나님만이 인간으로부터 최고의 존경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합당한 효도가 자식의 본분이듯 합당한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본분이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우상이란 창조주가 아니면서도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존경과 예배를 요구하는 파렴치한 거짓 신이며 그런 행위가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것이 우상을 내세워 경배를 강요하는 거짓 종교의 진상이며 그 배후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을 이끌어 온 사단인 것이다.
강요된 우상숭배를 단호하게 거절한 세 젊은이의 위대한 신앙 고백은 무엇이었는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세 젊은이는 우상숭배는 고려할 여지도 없는 요구이며 그들이 섬겨온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그들이 섬기는 사람의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자신들을 풀무불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른 목적이 있으셔서 그들의 생명을 구해내지 않으신다 해도 하나님만을 경배하려는 그들의 결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다.
풀무불에서 건져내지「아니 하실지라도(if not)」하나님만을 경배 하겠다는 세 젊은이의 신앙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신앙인가?
세상의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유지되는 거래 관계이다. 그러나 생명을 주고받은 특별한 사이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만은 그렇지 않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오히려 자식이 어려울수록, 부모가 손해 볼수록 더욱 강해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관계이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깨달은 자식은 자신이 불행하게 되거나, 부모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베풀 수 없는 때에라도 조건 없는 효도를 계속하는 효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생명을 주고받은 하나님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인간의 순수한 반응인 것이다. 무슨 혜택이나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유산을 받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같은 거래 행위이지 진정한예배가 아닌 것이다. 풀무불에서 건져내지 아니하실지라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세 친구의 고백은 진정한 예배가 무엇임을 천명한 것이다.
금 신상에 절하기를 끝내 거절한 세 젊은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단 3:19, 20).
자신의 호의마저 거절한 세 젊은이에 대해 격분한 왕은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달군 풀무에 그들을 던져 넣게 했다. 이 풀무는 요즈음도 볼 수 있는 바벨론의 벽돌 굽는 가마인데 원유와 짚을 섞은 인화성 연료를 썼으므로 7배나 뜨겁게 하기 위해 갑자기 양을 늘이자 좁은 입구로 불길이 솟아 나와 던져 넣던 군사들을 태워 죽게 했다.
풀무불 속에 던져진 세 젊은이에게는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가?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단 3:24~26).
입구를 통해 풀무 속을 응시하던 왕은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풀무불 속에 결박이 풀린 세 젊은이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 같은 또 다른 존재가 함께 거니는 모습을 목도한 것이다. “신들의 아들”과 같은 넷째 존재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이 충성스럽고 기특한 아들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풀무불 속까지 동행하신 것이다.
이 엄청난 기적에 대한 왕의 반응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합당한 조치였는가?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 3:28, 29).
머리카락 하나도 그슬리지 아니하고 살아 나온 세 젊은이를 목도한 왕은 즉시 그들이 목숨을 바쳐 섬긴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했다. 그리고 이러한 참 하나님에게 합당한 존경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몸을 쪼개어 죽이라는 끔찍한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선택의 자유를 전제로 하듯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져야 한다. 우상숭배를 강요한 것이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강요하는 조서를 내린 것 모두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짓밟는 범죄 행위인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강제된 예배를 받지 않으시며 자유 선택에 의한 진정한 예배만을 인정하신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누구도 박탈할 수 없는 권리이다.
마지막 시대에 모든 사람이 창조주이신 참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도록 요청하는 어떠한 기별이 주어졌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6, 7).
우주와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계시므로 자식이 부모에게 마땅히 그래야 하듯 모든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합당한 경배를 드려야 한다. 부모의 출산(出産)이 효도의 근거가 되듯 하나님의 창조(創造)는 참된 예배의 합당한 근거가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합당한 예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 11).
창조는 예배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기념일인 제칠일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날로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져야 하는 성일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십계명 가운데 넷째 계명에 명시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합법적인 예배일인 것이다.
마지막 때에 또다시 십계명에 명시된 합당한 예배를 고수하는 소수의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는 다수의 박해가 어떻게 예언되었는가?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5~17).
고대 바벨론 당시에 그랬듯이 마지막 때에도 영적인 바벨론으로 표상된 정치와 종교의 연합된 세력에 의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예배를 고수하는 소수가 또다시 핍박을 당할 것으로 예언되었다. 그것이 특별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불들의 근원을 만드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예배하는 제칠일 안식일 준수와 연관된 사실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 (출 31:13)이라고 선언되어 있어 장차 강요될 “짐승의 표”와 상반(相反)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는 요한계시록 연구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세상 역사의 마지막까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예배를 끝까지 고수할 특별한 백성이 있을 것임에 대해 어떠한 언급과 약속이 있는가?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자기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의 존재와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효도이다. 그것은 자식의 마땅한 도리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기원과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인정하는 인격적인 행위이다. 효도할 때 자식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사람다워지는 것이다. 인간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다. 인간이 자신의 피조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참으로 인간다워진다. 이처럼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분의 속성인 사랑에 반응하고, 그 분에게 합당한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가치에서 나온 말이다. 예배는 인간이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거기에 인간의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예배하지 않는 인간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가치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배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임을 깨닫는 인간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경험하게 된다.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절대적이기 때문에 무엇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거래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관계인 예배인 것이다. 그러한 예배가 참으로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한 예배가 참으로 가치 있지 않은가? 그러한 예배가 참으로 시급하지 않은가? 내가 바로 그러한 예배를 드려야 할 사람이 아닌가?
새롭게 변화된 사람
주 제절 :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 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 (단 4:17)
세상에는 참으로 문제가 많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도덕, 환경··· 문제 아닌 것이 없고, 문제없는 데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의 근원은 언제나 사람이다. 모든 문제는 언제나 사람이 만든다. 사람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대답도 역시 사람이다. 사람이 대답인 것이다. 사람이 변화되기 전에는 세상의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는다. 사람이 변화될 때 모든 것이 변화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없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최대의 이적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을 달라지게 하는 것이 이적인데 이적 중의 이적은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런 최대의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태평성대가 계속되던 어느 날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신상에 관해 알려주는 어떤 꿈을 꾸었는가?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으되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을 인하여 번민하였었노라” (단 4:4, 5)
다니엘서 2장의 신상 해석과 3장의 금 신상 경배 사건을 통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깨닫고 얼마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듯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태평성대가 계속되면서 왕은 다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기고만장 해져서 매사에 자신을 높이고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렸다.
왕이 꾼 꿈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단 4:10, 11).
꿈에 본 거대한 나무에 대하여 하늘에서 어떤 불길한 명령이 전달되었는가?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가 소리 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단 4:13, 14).
꿈에 본 거대한 나무가 찍혀 넘어지고 난 뒤에 계속하여 어떤 일이 그 나무에 일어나리라고 통고되었는가?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단 4:15, 16).
꿈을 통고한 하나님의 천사를 가리키는 하늘의 순찰자는 이 꿈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밝혔는가?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 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 (단 4:17).
이 불가사의한 꿈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자 왕은 다니엘에게 또다시 어떤 요구를 했는가?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박사가 능히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니라” (단 4:18).
앞서 공부한 다니엘서 2장에서 느부갓네살이 꾼 꿈은 처음부터 꿈을 잊어 버렸으므로 해석할 여지가 없었으나 이번에 꾼 꿈은 꿈의 내용은 생생히 기억했어도 해석을 알 수가 없었다. 관례대로 꿈의 해석을 박사들과 점성술사들, 그리고 자문위원들에게 요청했으나 그들은 아무런 해석을 제시하지 못했다. 아마도 꿈의 내용을 보아 흉몽인 것이 분명했으므로 고의로 꿈의 해석을 회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최선의 대답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던 다니엘이 또다시 소환되었다. 왕은 다니엘이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왕으로부터 꿈의 내용을 들은 다니엘은 어떤 반응을 보였으며 이에 대한 왕의 반응은 또 어떠했는가?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을 인하여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단 4:19).
꿈의 내용을 들은 다니엘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껏 교만해진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는 흉한 일이 예고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의 표정을 읽은 왕은 그 꿈이 자신에 관한 불길한 내용임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다니엘이 진심으로 자신의 복리와 안전에 대해 깊은 우려와 관심을 가진 진실 되고 충성스러운 신하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이러한 확신을 주지 못한 채 다니엘이 경솔한 태도로 흉한 해석을 왕에게 고했다면 왕의 분노를 일으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어떤 불길한 해석이라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왕에게 다니엘은 그 나무의 정체를 어떻게 밝혔는가?
“왕의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 거하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더라 하시오니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단 4:20~22).
그 큰 나무를 베어 넘긴 후에 일어난 흉한 일들은 무엇을 뜻하는 내용이었는가?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더라 하시오니 왕이여 그 해석을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단 4:23~25 상단).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그 꿈을 계시로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밝혔는가?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단 4:25 하단, 26).
오늘날의 이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처럼 느부갓네살도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다스려지며 역사는 자기가 뜻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치명적인 오해였다. 세상의 장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으며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목적을 이루는 과정임을 알아야 했고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순종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따라서 통치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도 깨달아야 했으나 느부갓네살은 전혀 그렇지 못했으므로 혹독한 시련을 통해 교훈을 배워야 했다.
즉 지금의 모든 권한과 영광을 박탈당하고 7년간 짐승처럼 비천하게 살게 된다는 선고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새 사람이 된 후에야 복권이 되고 공의로 다스리게 될 때 그의 통치권이 확고해지고 나라가 태평해지리라는 예언적인 선언이었다.
이처럼 불행한 일이 집행되지 않기 위해서 왕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라고 제시되었는가?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단 4:27).
불행하게도 왕에게 선고된 집행 유예는 어떤 일로 취소되고 형벌이 즉시 집행되었는가?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열 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단 4:28~31).
선지자 다니엘은 이미 선고된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집행되지 않도록 속히 회개하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탄원했다. 먼저 지금까지 범한 온갖 죄를 회개하여야 하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진정으로 회개했음을 행동으로 입증하기를 요청했다. 감히 전제군주의 죄를 이렇게 직접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일은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으나 다니엘은 왕에 대한 사랑을 확신시킴과 동시에 선지자의 직분을 과감히 수행한 것이다. 철저한 회개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의 죄는 하나님의 존재와 권위를 무시하고 자신만을 높이는 교만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스스로 찬양하며 자신이 하나님처럼 영광을 받으려는 예배횡령죄를 범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루스벨이 하늘에서 추방되어 사단이 되게 한 죄의 근본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무신론 사회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파멸적인 인간의 신격화이다.
회개하지 않은 왕에게 무슨 형벌이 어떻게 집행되었는가?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단 4:31, 32).
느부갓네살 왕에게 집행된 형벌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적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단 4:33).
기고만장하던 왕이 하늘의 선고를 듣는 순간 그에게서 사람의 마음이 떠나고 짐승의 마음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을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일종의 정신병이었다. 자신을 소라고 생각하는 정신병인 “보안드로피”(boanthropy)도 있고, 자신을 새라고 생각하는 정신병 “아비안드로피”(avianthropy)도 있다. 참으로 무서운 정신병인데 과거에 프랑스의 찰스 4세, 덴마크의 크리스챤 7세, 영국의 죠지 3세 등도 이러한 정신병에 걸린 예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느부갓네살이며 7년을 뜻하는 “일곱 때” 동안 짐승처럼 행동한 것이다. 이 사실은 근년에 발견된 바벨론의 점토 문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고백하였는가?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조서하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지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단 4:1 ~3).
왕은 자신의 경험을 최대의 이적이라고 고백했다. 병이 낫는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은 사람의 본성이 바뀌어 변화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난날, 본능대로 살고 권력을 위해 짐승처럼 살던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간이 된 사실은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범죄 함으로 짐승처럼 되었다가 복음을 듣고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거듭난 왕은 이 사실을 조서 형식으로 온 나라에 선포하여 자신을 변화시키신 다니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이리하여 마르둑을 섬기던 폭군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전도자 느부갓네살이 된 것이다. 폭군이었던 느부갓네살 왕도 세 차례의 경험과 기별을 통해 세상에서는 화려하고 위대했지만 실상은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을 청산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되찾아 하나님을 예배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짐승과 같던 폭군이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된 것이다. 지금의 나의 삶은 어떠한가. 그러한 느부갓네살이 새롭게 변화되어 구원을 받았다면 나에게는 더욱 확실한 희망이 있지 않은가.
바벨론의 멸망
밤은 하루를 끝내는 마지막 시간이다. 밤이 없는 날이 없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마지막 밤이 있으며, 모든 나라에도 마지막 밤이 있어 왔다. 단지 그 밤이 언제인지 모르고 하루하루를 사는 것뿐이다. 본능대로 살고, 재물만을 위해 살면서, 하나님과 영원한 사물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이러한 선고를 듣게 된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 자신의 구주를 배반한 채 성만찬의 빵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 13:30)고 기록된 가룟 유다의 마지막 밤은 아침이 다시없는 영원한 밤이었다.
기원전 539년 10월 13일은, 대담하게도 하나님을 모욕하면서 술과 여자와 우상숭배에 빠졌던 바벨론 왕 벨사살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 밤은 벨사살 자신의 마지막 밤이었고 동시에 대제국 바벨론의 마지막 밤이기도 했다.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나의 마지막 밤은 언제일까?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 밤은 끝없는 암흑의 밤인가, 아니면 밝은 아침이 약속된 안식의 밤인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누구인가? 바벨론의 마지막 밤의 역사 기록인 다니엘서 5장은 벨사살을 마지막 왕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일반고대 역사에는 나보니더스(Nabonidus)로 기록돼 있다. 성경을 불신하는 비평가들은 이 사실을 들어 성경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증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1924년 시드니 스미스(Sydney Smith)에 의하여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고대 점토 문서 “나보니더스에 관한 이야기”가 출판됨으로써 진실이 밝혀졌다. 마지막 왕 나보니더스가 그의 재위 3년에 북부 아라비아의 테마(Tema)로 원정을 떠나면서 장자인 벨사살에게 왕위를 위임하여 그를 섭정왕으로 삼았으며 바벨론 성을 통수하게 하였다. 바벨론 성이 페르샤에게 함락되던 당시 바벨론 성을 지키고 있던 바벨론 왕은 나보니더스가 아니라 벨사살이었음이 고고학의 기록에서 확인된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틀릴 수 있어도 성경의 기록은 틀릴 수 없음이 확인된 것이다. 역사에 관해서도 성경은 정확한 교과서이다.
바벨론의 마지막 밤의 장면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단 5:1).
고대의 대제국 바벨론의 마지막 밤은 정확히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밤이었다. 고대 역사에 의하면, 당시 바벨론은 신흥 대제국인 페르샤성경의 바사의 국부 고레스(Cyrus)의 연합군에 의하여 연전연패하여 전선에 나갔던 부왕 나보니더스는 10월 10일 보르시파 성으로 퇴각하였으며 섭정왕 벨사살은 바벨론 성을 지키고 있었다. 5장의 사건은 페르샤의 연합군이 바벨론 성을 포위한 가운데 성안에서 베풀어진 마지막 잔치였다.
왜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술잔치를 베풀었을까?
술은 불안하고 초조할 때 뇌신경을 마비시켜 일시적인 평안을 느끼게 하는 진정제이다. 그것은 축제가 아니라 겁에 질린 왕의 공포를 달래어 떨어진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베푼 겁쟁이의 술잔치였으며 적에게 포위되어 불안해하는 국가 지도급 인사 1천명을 초청하여 자신과 국가의 건재를 과시하기 위한 전시용 잔치이기도 했다.
잔치 도중 술에 취한 왕에 의해 어떤 불경스러운 일이 저질러졌는가?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단 5:2, 3).
술에 취하여 정신이 몽롱해진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 당시 하나님을 섬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노략해 온 금, 은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여 왕후와 빈궁들과 더불어 그것들로 술을 부어 마시게 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의 금, 은 그릇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 봉사에 쓰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서 지극한 성물이었다. 게다가 그러한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정례가 아닌 후궁들과 처첩들과 더불어 그 그릇에 술을 부어 마신 것을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신성모독 행위였다.
이처럼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담하게 모독하는 한편 누구를 찬양하였는가?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단 5:4).
바벨론은 다신교 국가로 우상숭배의 종주국이었다. 지방 마다 도시마다 별개의 신들이 있었으며 각종 금속과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들이 신으로 숭배되었다. 게다가 멸망 당시 바벨론 성안에는 페르샤에 의해 함락된 도시들과 지방들에서 피신시킨 온갖 신들이 집결되어 있어 가히 우상신들의 전시장을 방불하게 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사용되는 성전의 거룩한 그릇에 술을 부어 여자들과 더불어 마시면서 우상을 찬양한 난잡한 행위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신성모독의 극치였다.
성경은 우상숭배를 금하는 한편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필수 조건으로서 무엇을 명하고 있는가?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26:1. 2).
성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로서,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시간으로서 특별히 성별되어야 하는 참다운 예배의 필수 요소이다.
마지막 때에도 영적인 바벨론에 의해 어떤 파멸적인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고되었는가?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계 18:1, 2).
오늘날도 교회가 하나님 대신 세속적인 권력을 의지하고 유형, 무형의 우상숭배를 고집하면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기를 거절하고 영적인 판단을 그릇 가르치는 잘못된 신앙을 가르치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술을 허용하면, 교회는 멸망 전야의 고대 바벨론처럼 사단의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된다는 두려운 경고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대담한 행위가 극치에 달했을 때 어떠한 극적인 일이 일어났는가?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단 5:5).
바벨론의 마지막 밤 술잔치가 벌어졌던 곳은 느부갓네살이 세운 가공원에 잇달아 지은 남궁의 중앙홀로 확인된다. 남궁 중앙에는 길이 약 52미터, 폭 17미터, 높이 18미터 가량의 넓은 홀이 있었고 신비한 글씨가 쓰여진 벽은 보좌 맞은편의 높다란 석고 분벽으로 생각된다.
이 뜻밖의 사건에 대한 왕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단 5:6).
술에 취한 벨사살은 정체불명의 손가락이 써 놓은 뜻도 모르는 몇 자의 글을 보는 순간 얼굴은 창백해졌고 오금이 내려앉아 공포에 휩싸였다. 죄를 지은 사람의 양심은 스스로의 정죄에 따라 부과된 두려운 죄책감에 절로 압도되는 것이다.
이 돌발적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가?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 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단 5:7~9).
공포에 휩싸인 왕은 소리쳐 보좌관과 박사, 점성술사를 불렀으며 그 글을 읽고 해석하는 자에게 나라의 세 번째 자리까지 약속했다. 왜 하필 “세 번째 자리”였을까. 벨사살은 아직도 생존해 있는 아버지 나보니더스의 섭정 왕이었으므로 부왕과 자신을 제외한 다음 자리는 세 번째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비한 글자를 읽고 해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과 참석자들의 공포는 그럴수록 증폭되었다.
이 때에 도움을 자청하고 나선 태후는 누구이며 어떠한 제안을 했는가?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 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피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단 5:12)
이 위태로운 순간에 왕궁의 소란을 듣고 달려온 태후(太后)는 누구인가. 태후라는 표현은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를 가리킬 수 있는 용어인데, 벨사살의 할머니는 그 일이 있기 8년 전에 별세했기 때문에 이곳의 태후는 왕의 어머니이자 느부갓네살의 딸인 니토크리스(Nitocris)로 다니엘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왕은 다니엘을 불러 어떤 말을 했는가?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단 5:13, 14, 16).
다니엘은 그 당시 이미 84세를 넘긴 고령으로 정계(政界)를 떠나 있었을 것이므로 벨사살은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 늠름한 다니엘을 처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다니엘을 사로잡아 온 느부갓네살이 어떻게 벨사살의 “부왕”이 되고 벨사살은 그의 “아들”이 되는가? 이곳의 “아버지”, 혹은 “부친”이라는 말은 아버지 말고도 조부, 증조부, 고조부, 조상 등을 일컬을 수 있는 폭넓은 용어이다. 벨사살의 경우 느부갓네살의 딸인 그의 어머니를 통해 그의 외손자가 될 수 있으며, 느부갓네살의 의붓아들이었던 부왕 나보니더스를 통해서는 그의 의붓 손자가 될 수 있어 이곳에서는 선왕의 뜻으로 쓰였다.
해석에 나선 다니엘의 입장과 반응은 어떠했는가?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단 5:17~21).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장하고 늠름한 다니엘은 죄책감과 불안으로 초췌해지고 공포로 떨고 있는 미결수 벨사살을 심문하는 판사의 모습으로 군림했다. 그는 이미 선고된 바벨론의 운명을 염두에 두고 바벨론이 제공하는 일체의 명예나 호의를 거절하고 그의 논고를 시작했다. 다니엘은 벨사살의 외조부였던 느부갓네살의 경험을 일일이 들추어가며 벨사살의 죄상을 깨닫게 했다. 부인할 수 없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속성을 확실히 알 게 되었으면서도 명백한 교훈을 받지 못하고 이처럼 대담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은 용서받지 못할 처신이었다. 그처럼 위대했던 대왕 느부갓네살도 끝내 경배한 하나님을 이처럼 무시하고 공공연히 모독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사살과 바벨론의 파멸을 가져온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단 5:22, 23).
한 마디로 교만과 자만이었다. 피조물인 자신을 창조주인 하나님 이상으로 높이고,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하는 존경과 영광을 빼앗은 예배 찬탈 죄였으며, 그것을 자기숭배의 방편인 우상숭배로 대치한 예배 횡령죄였다. 그것은 부모의 존재와 권위를 무시하고 오히려 능멸한 패륜죄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였다.
마지막 때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엄숙한 기별은 무엇인가?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7).
벨사살과 바벨론의 종말을 가져왔던 동일한 죄가 마지막 세상에 파멸을 가져올 것으로 예고되었다.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성을 가진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반응이다. 식물이 태양 빛에 반응하기를 거절하면 광합성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꽃도, 열매도 발생할 수 없듯이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존재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불행이요 파멸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끝까지 거절하고 우상숭배를 선택한 왕에 대한 선고는 무엇이었는가?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단 5:24. 25).
그 신비한 선고문의 해석은 무엇인가?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단 5:26~28).
글자는 당시 바벨론의 공용어였던 아람어로서 쉽사리 읽을 수는 있었을지라도 문장이 아니어서 뜻을 바로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메네”(mene)는 “계산되다”, “헤아려지다”는 뜻이며, “데겔”(tekel)은 “저울에 달려지다”는 뜻이고, “우”(u)는 접속사로 “그리고”이며, “바르신”(pharsin)은 “베레스” (peres)의 복수형으로 “조각들”이란 뜻인데, 복수일 경우 “조각들”이란 말 대신 “페르샤 사람들”(Persians)로 불릴 수도 있다. 해석된 선고의 내용인즉, 벨사살과 그의 나라가 헤아려 보고 달아본 결과 기준 미달로 더 이상 존재해야 할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포위하고 있는 메대와 페르샤에게 나라를 넘기시겠다는 최후의 통고였다. 희희낙락하던 술잔치는 이제 공포와 불안으로 아우성치는 수라장이 되었다. 바벨론의 마지막 밤 술잔치는 죄악의 잔을 채워 마침내 심판을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신비한 글자를 읽은 다니엘의 준엄한 선고가 있은 직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단 5:30).
여러 날 난공불락의 요새인 바벨론 성을 헛되이 포위하고 있던 메대와 페르샤의 연합군은 묘안을 얻었다. 바벨론 성이 유프라테스 강 위에 건설되었음을 기억하고 상류의 물을 분지로 돌려 강물의 수위를 낮추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특공대들은 통로가 된 강바닥을 통해 바벨론 성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으며 술에 취해 있던 바벨론의 수비대를 제치고 술잔치 자리까지 돌진하여 방금 다니엘의 선고를 듣고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 왕을 살해함으로써 바벨론의 종말을 가져왔다.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밤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느부갓네살이 꾸었던 황금 꿈이 70년도 못 되어 흉몽으로 끝난 밤이기도 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최후가 고대 바벨론의 멸망과 흡사할 것임을 어떻게 예언하고 있는가?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계 16:12, 19, 20).
고대 바벨론이 동방에서 온 왕들인 메대 왕과 페르샤의 왕 고레스(Cyrus)에 의해 졸지에 멸망당했듯이 타락한 바벨론의 신앙과 문화로 가득 찬 이 세상도 그렇게 졸지에 마지막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동방의 페르샤 왕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이 멸망하면서 포로 되었던 유대 백성들이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듯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 이르게 될 것이다 (히 12:22, 23).
오늘날 영적인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호소가 있는가?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계 18:4, 5).
마치는 말
고대 바벨론을 경고하고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통하여 세 차례에(다니엘서 2장, 3장, 4장) 걸쳐서 분명한 기별을 보내셨다. 그러나 파렴치한 왕 벨사살과 바벨론의 백성들에 의하여 그 기별은 끝내 거절되고 마침내 바벨론의 종말(다니엘서 5장)이 신속히 이르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문화적으로, 신앙적으로 바벨론이 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마지막에도 「세천사의 기별」로 알려진 세 차례의 메시지기별를 보내셨다(계 14:6~12). 이 기별에 대한 반응에 따라 각 사람과 세상의 영원한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 귀하는 이 기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느부갓네살의 회개와 구원인가, 아니면 벨사살의 불순종과 파멸인가
위대한 노년
주제절 :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인생의 노년
늙음을 탄식하고 백발을 서러워하는 마음은 동서고금에 다름이 없다. 사람은 예외없이 늙어가고 백발과 함께 삶을 마치게 된다. 거러나 여기 늙음을 두려워하거나 탄식하는 대신 늙음의 의미를 다르게 만든 위대한 노년이 있다. 젊은 나이에 이역만리 타향에 포로로 잡혀온 18세 소년 다니엘은 85세의 노경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시들지 않는 인생 상록수였으며 늙음을 거부하는 불사조였다. 그는 쇠퇴하는 노년에 가장 진취적인 일을 했으며 모든 것에 소심해지는 노경에 가장 대담한 경험을 했다. 일출의 여명보다 황혼의 낙조를 더 아름답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한 위대한 노년을 감상하자. 무엇이 노년을 이처럼 위대하게 만드는가.
노경에 이르렀을 때의 다니엘의 신분이 어떻게 기록돼 있는가?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또 그들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이라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단 6:1, 2).
바벨론은 망하였으나 다니엘은 망하지 아니하였다. 정복당한 바벨론을 다스리는 과도기에 왕이 된 메대 왕 다리오는 정복한 바벨론을 다스리는 일에 노 정치인 다니엘을 다시 기용하여 세 명의 총리 중 수석 총리로 임명했다. “그 중에 하나이라”는 표현은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났다”는 말에서와 같이 실제로는 “그중에 첫째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니엘은 언제나 어디서나 으뜸가는 사람이었다. 85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마음이 민첩하여 정확한 기억력과 빠른 판단과 청렴한 인격을 유지하면서 탁월한 업무 수행을 통하여 최고의 신임과 호감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다니엘의 신변에 어떤 심각한 일이 일어났는가?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단 6:4).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언제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성공하기 위하여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함과 동시에 성공한 후에 그것을 유지하는 데도 못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가운데 가장 혹독한 대가는 다른 사람들의 무서운 시기와 질투를 견뎌내는 것이다. 골짜기의 작은나무는 바람을 타지 않지만 산등성이의 높은 나무는 거센 바람을 맞게 된다.다니엘은 이제 그 탁월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동료들은 그의 출신과 신분을 못마땅히 여겨 그를 모함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다니엘은 공직자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일체의 비리가 없는 사람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적으로 바뀐 다니엘의 동료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를 모함하여 죽이려 했는가?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여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단 6:5~7).
적들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결코 별치 않을 것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목숨을 바쳐 순종할 것을 확신하고 30일 동안 국왕 다리오 외에는 아무 신에게도 기도드리는 일을 금하여 새로 취임한 왕에 대한 충성심을 확고하게 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특별한 캠페인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참으로 악한 본심을 선한 처신으로 위장한 무서운 모략이었다.
이 사실을 자신에 대한 충성으로 오해한 왕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다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다리오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단 6:8, 9).
자신의 입지 강화와 자기숭배의 함정에 빠진 왕은 즉시 신하들의 충성심에 감복되어 일단 제정되면 취소가 불가능한 메대와 페르샤의 법에 다라 조서에 어인을 찍었다. 다니엘의 목숨을 겨냥한 30일간의 왕권 강화와 기도 금지령이 전국에 선포되었다.
이 두려운 조서에 대한 다니엘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직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자신이 엄연히 나라의 총리인데도 인종과 신앙 때문에 철저히 따돌림을 당한 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법령이 자신도 모르게 제정되어 공포된 사실을 뒤늦게 알 게 된 다니엘은 얼마나 분개하고 초조했을까. 그러나 다니엘은 놀랍게도 태연자약하게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전에 하던 대로” 변함없이 처신하였다.
동쪽에서 떠서 서족으로 지는 태양처럼, 언제나 제 궤도를 달리는 별처럼 다니엘은 온종일 국무에 충실했으며, 일과를 끝낸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 늘 하던 대로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고 있는 고국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 쪽에서 하루 세 번씩 기도드리는 일을 계속했다. 다니엘은 당장 살기 위해 기도를 중지하지 않았으며 몰래 기도하므로 고소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서 대문에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왔다는 인상조차도 남기기를 거절했다.
다니엘이 보여준 대로 목숨을 내놓을 만큼 기도는 그렇게 중요한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7, 18).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그것은 영적 능력의 비결이다. 다른 어떤 은혜의 수단도 기도를 대신한 수 없으며 영혼의 건강을 보존할 수도 없다” (엘렌 G. 화잇).
기도를 그치는 것은 호흡을 그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영적인 생명의 죽음을 의미한다. 잠시라도 숨을 안 쉬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항상 기도하지 않고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더 힘든 일을 해야 할 때, 더 빨리 뛰어야 할 때 더 많이 호흡해야 하듯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이 걸린 이 싸움을 치르는 지금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왕에게 기도드리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그치는 일은 도무지 생각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다니엘은기도드릴 수 없는 왕궁보다 기도드릴 수 있는 사자굴이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니엘의 확고한 결심을 확인한 고소자들은 왕에게 어떠한 요구를 했으며 의외로 왕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그들이 왕 앞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사로잡혀온 유다 자손 중에그 다니엘이 왕과 왕의 어인이 찍힌 금령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인하여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내려고 힘을 다하여 해가 질 때까지 이르매” (단 6:11, 13, 14).
충성스럽게 여겨졌던 신하들이 조서 위반 사실을 들어 다니엘을 고소하는 말을 듣는 순간, 왕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하들의 제안이 왕을 위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적인 다니엘을 제거하려는 음모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왕이라할지라도 변경할 수 없는 메대와 페르샤 법은 그대로 집행하여야 했다. 왕은 분노와 근심에 싸여 기나긴 하루를 보냈다.
철칙인 페르샤 국법의 집행을 촉구하는 고소자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왕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단 6:16).
고대 메대와 페르샤 법은 변개나 취소가 불가한 철칙이었다. 왕은 자신도 어절 수 없는 자신이 내린 법령에 따라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의 과거 행적을 알고 있는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당신의 신실한 종을 구원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리하여 자신의 진심을 다니엘에게 고백하는 한편, 고소자들이사자굴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다니엘을 죽이지 못하도록 왕의 어인을 찍어 굴을 석고로 봉인했다. 다니엘을 던져 넣은 사자굴은 그 당시 왕이 즐기는 스포츠인 사자 사냥을 위해 궁중 근처의 정원에 사자를 가두어 둔 굴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뜬눈으로 밤을 보낸 다리오왕은 이른 새벽 어떤 일을 했는가?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단 6:19, 20).
사자굴에서 편안한 밤을 보낸 다니엘은 어떤 말로 왕의 문안에 대답 했는가?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단 6:21. 22).
다니엘의 생사를 확인한 왕은 잇달아 어떤 법적 조치를 취했는가?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단 6:23, 24).
법은 일단 집행되었으므로 자기숭배라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충성된 수석총리 다니엘을 모함하여 죽이려 했던 간교한 신하들에 대한 왕의 분노는 폭발되었다. 왕은 다니엘이 방금 살아서 나온 그 사자굴에 다니엘을 모함한 참소자들과 처자식들을 던져 넣게 하였으며 그들은 순식간에 밤새 다니엘에 의해 식욕이 자극된 굶주린 사자들의 아침밥이 되고 말았다.
이 엄청난 사실을 목도한 왕은 다니엘이 섬겨온 하나님을 높이고 어떠한 조서를 내렸는가?
“이에 다리오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이제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단 6:25~27).
메대 사람 다리오왕 원년에 발생한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어떤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단 9:1~4).
여기에 아주 심각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진 6장의 사건과 9장의 사건은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다. 즉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고한 대로 (렘 29:10) 다니엘은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의 포로 생활이 70년만에 마쳐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가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이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금식하며 하나님 백성의 사활이 달린 기도를 드리고 있던 때였다.
이처럼 중요한 기도를 드리지 못하도록 사단은 사자굴로 위협하며기도 금지령을 내리게 하였으나다니엘은 기도할 수 있는 사자굴을 택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드린 다니엘의 기도 내용이 바로 그처럼 중요한 9장의 내용이다. 그 가운데는 죄 지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시간과 일생에 관한 일급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숨을 걸고 드린 그처럼 중요한 다니엘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는가?
대제국의 총리가 정적들의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그가 충성해온 하나님의개입으로살아 나왔으며, 그 대신 정적들과 그 가족들이 던져져 죽임을 당한 사건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기원전 538년 당시 62세였던 메대인 다리오왕은 그 사건 얼마 후에 퇴위하였으며 뒤를 이어 즉위한 페르샤의 국부 고레스 대왕(Cyrus Ⅱ)은 그의 통치 원년인 기원전 537년 다니엘의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두려움에서 제1차 유대인 석방령을 내림으로써 기원전 605년에 시작된 유대인의 포로 기간을 70년째가 되는 537년에 종결지었다. 이리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한사단의 계교가 오히려 그 일을 이루어지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아래의 말씀이 이러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 다니엘이 다리오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단 6:28).
다니엘의 노년은 참으로 위대했다. 조상과 어른들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하고 18세의 젊은나이에 이역만리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시작한 다니엘의 일생은 사람이 듯을 정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살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된다. 나라는 망하고 왕들은 폐해졌으나 전천후 인간 다니엘의 일생은 연륜이 더할수록 더욱 위대해졌다.
그 리고 85세가 넘어 가장 고령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과 민족을 위해 가장 위대한 공헌을 했다. 참으로 위대한 노년이었다. 모든 일은 끝이 좋아야 좋은 것이다. 사람도 끝이 잘되어야 참으로 잘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다니엘과 같은 위대한 노년을 원한는 사람은 다니엘처럼 젊은 시절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뜻을 정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해야 하며 철두철미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열심 있고 끊임없는 기도의 생애를 살아야 한다.
예언에 나타난 대 제국들과 하나님의 통치
주제절 :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 (단 7:27)
다니엘은 어느 때에 세상의 장래에 관한 계시를 받았는가?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단 7:1).
벨사살은 앞서 언급한 대로 메대와 페르샤 연합군에 의하여 기원전 539년 죽음을 당한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다. 벨사살 원년은 그가 아버지 나보니더스의 섭정을 시작한 기원전 553년경이다. 고령의 다니엘은 꿈의 형식으로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여 지금 우리가 연구하는 다니엘서의 내용이 되게 했다.
선지자 다니엘은 계시 가운데 역사의 무대인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장면들을 보았는가?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단 7:2, 3).
예언에서는 거의 언제나 상징을 쓴다. 왜냐하면그것이 그 냉용을 보전하는 데 안전하고, 시청각 교재가 됨으로써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영상매체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예언서에 자주 나타나는 다음의 상징이나 표현들은 아래와 같은 의미들을 지니는데 이미 그 해석이 성경에 의하여 확인된 내용들이다.
당시 역사의 무대가 근동 지방이었으므로 바다의 일차적인 배경은 지중해 세계이다. 한차례 전쟁의 풍운이 세상을 휩쓸 때마다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약자를 정복한 힘센 나라들이 사나운 짐승처럼 차례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다니엘당시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첫 번째 짐승은 어느 나라인가?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단 7:4).
다니엘이 살던 시대가 기준이 된 이 상징적인 예언에서, 첫 번째로 등장한 나라는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의 나라 바벨론(신바빌로니아)인데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다. 성경에서는 바벨론을 숲 속의 사자로 표현했으며(렘 4:7) 사나운 독수리로도 표현했다(애 4:19). 바벨론의 폐허에서 발굴된 미술품과 부조에서도 이 사실이 확인되었다. 고대 바벨론은 짐승의 왕인 사자와 새중의 왕인 독수리의 드높은 기상으로 근동 세계를 제패했다. 그러나 다니엘의 목전에서 연출된 대로 날개가 뽑히고 앞발이 들리면서 사자의 기개와 용맹을 잃고 문약해지다가 마침내 기원전 539년, 건국 후 70년도 못 되어 메대와 페르샤의 연합군에 의하여 패망했다.
바벨론에 이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두 번째 짐승은 어느 나라인가?
daniel-68-1.gif”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단 7:5).
사자의 나라 바벨론을 이어 두 번째로 등장한 나라는 곰과 같이 끈질기고 잔인한 나라인 메대와 페르샤였다. 곰이 몸 한편을 들었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세력의 불균형을 이룬 두 나라는 처음에는 페르샤가 메대의 속국이었으나 국부 고레스왕 때 이르러 친족의 나라인 메대를 병합하여 페르샤로 통일하는 과정을 몸짓으로 나타낸 것이다.입에 문 세 갈빗대는 무엇인가. 적어도 세 나라를 정복했음을 뜻하고 있다. 메대를 병합하는데 성공한 페르샤의 고레스 대왕은 기원전 547년 소아시아의 부국인 리디아(Lydia)를 먼저 정복했으며, 539년에는 바벨론을 힘들이지 않고 정복했다. 전사한 부왕 고레스를 이어 즉위한 아들캄비세스 2세(Cambyses Ⅱ)는 기원전 525년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많은 고기를 먹으라”는 예언처럼 엄청난 살육을 거쳐 명실공히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란 고원에서 자란 곰의 나라 페르샤는 헬라 반도에서 출현한 표범의 나라 그리스와 각축하다가 기원전 331년 알벨라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속절없이 종말을 맞았다.
페르샤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짐승은 어느 나라인가?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단 7:6).
곰의 나라 페르샤를 정복한 머리가 넷이고 날개까지 달린 표범은 빠르고 용맹스러웠던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이다. 아버지 필립 대왕을 이어 20세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는 22세 때인 기원전 334년, 3만 5천의 소수군대와 1개월 분의 식량만을 가지고 세계 정복에 나서 기원전 332년에는 이집트를, 331년에는 숙적 페르샤를 패망시키고 메대를 점령한 후 인도까지 단숨에 진격하였다. 참으로 새처럼 빠르고 표범처럼 용맹한 정복자의 행보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에 지친 부하들의 간청에 따라 회군을 결심하고 바벨론으로 귀환한 후 잇단 폭음 끝에 습지열에 걸려 33세를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20대의 젊은이가 20년 이내에 이룩한 세계 정복의 찬란한 꿈도 비누방울처럼 꺼지고 말았다. 기원전 168년 그의 조국 마케도니아가 신흥 로마제국에 의해 패망함으로써 표범의 나라 그리스의 시대도 덧없이 종막을 고했다.
그리스에이어 네 번째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짐승은 어느 나라인가?
다니엘에게 계시를 설명한 천사는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임을 확인함으로써(단 7:23) 그것이 바벨론, 페르샤, 그리스 다음의 네 번째 국가인 로마제국임이 확실해졌다. 강력한 군대와 정치 조직을 가진 철의 나라 로마제국은 “큰 철 이”를 가진 무서운 괴물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라틴민족의 국가인 로마는 작은 국가로 시작하였으나 거친 말발굽으로 도전하는 나라들을 가차없이 정복하여 마침내 지중해 전역을 철권으로 다스리는 막강한 대제국이 되었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태어나신 유다 땅도 그 로마의 식민지였으며, 끝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큰 못도 이 무서운 짐승 로마의 “큰 철 이”었다. 그리고 200년 이상이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무수히 죽이고 무섭게 핍박한 나라가 바로 다니엘을 그토록 두럽게 만든 괴물같이 무서운 짐승 로마였다.
작은 뿔은 어떤 방법으로 “큰 말하는 입”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했는가?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단 7:25 상단).
이미 역사적인 조명을 통해 확인된 작은 뿔인 로마교황권은 교황에게만 적용되는 칭호와 표현을 통해 교황의 위상(位相)이 하나님과 거의 방불한 것임을 아래와 같이 공식화하고 있다.
「교황은 그토록 큰 위엄과 높은 때문에, 그는 단순히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말하나면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교황은 하늘과 당과 지하 세계의 왕으로서 삼중관을 쓰고 있다.」
「교 황은 말하자면, 땅 위의 하나님이요, 그리스도를 신실히 믿는 사람들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많은 권세를 가진 ‘왕중왕’ 이다(Lucius Ferrais, “Papa Ⅱ” Prompta Bibliotheca, vol, Ⅵ, 25~29).」’
작은 뿔은 실제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했는가?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단 7:25 중단).
중세기 로마교황권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처하고 교황의 명려이나 교회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을 종료재판을 통하여 이단으로 정죄하고 화형을 포함한 가혹한 형벌을 집행했다. 중세 교황권의 이단은 다름 아닌, 루터, 칼빈, 재세례파 등 모두 개신교도들이었다.「스페인에서만 종교재판에 의하여 고난당한 사람들은, 산채로 화형당한 사람이 31,912명으로 헤아려졌고, 소위 복종하도록 강요된 참회자가 291,450명으로 계산되었다.
알비젠스인(Albigenses)들의 대학살에서는 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제수이트(Jesuits) 제도가 처음 확립된 지 30년 동안에 900,000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당했다. 네덜란드에서는 가톨릭신자인 알바 공의 지시에 따라 36,000명이 보통 집행자들에 의해 신속히 사형에 처해졌는데, 알바 공은 이러한 행위를 자랑했다. 찰스 5세의 치하에서는 50,000며의 포랑드르인들(Flanders)과 독일 사람들이 교수형과 화형과 생매장을 당했다.」(Guiness, Key to the Apocalypse, 92, 93, Albert Barnes, Notes on Daniel, 328).
세계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학살로 꼽히는 1572년 5월 24일의 성 바돌로매 제일(祭日)의 대학살에서는 열렬한 가톨릭신자였던 왕의 어머니 캐더린(Catherine)이 개신교도인 위그노파를 제거하기 위해 속임수를 써서 그들을 모으고 새벽 2시 졸지 에 살생을 감행하여 파리에서 8천명, 전국에서 3만여명의 개신교도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1536년에는 자국어로 된 성경을 배포하지 말라는 교황의 명령을 거스르고 최초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옥스퍼드 출신의 개혁자 틴데일(Tyndale)을 화형에 처했다.
작은 뿔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와 법을 변경하였는가?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단 7:25 하단).
“교황은 그토록 큰 권위나 능력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수정하거나 서명하거나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에 입각하여 실제로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을 내용이 전혀 다른 「천주 십계」로 변경하여 그대로 쓰고 있다.
재림 전 심판의 때
주제절 :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단 8:14).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며 나날이 초조와 불안과 공포로 보내고 있던 어느 사형수가 탄식하며 말했다. “죄를 짓더라도 죽을 죄는 짓지 마시오.” 참으로 죄는 무서운 것이다. 죄는 그토록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의 생명을 가차 없이 빼앗아 가는 파멸과 불행의 뿌리요 원인이다. 죄 지은 인간이 속절없이 치러야 하는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5)
그런데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이미 선언 되었다(롬 3:10). 죄를 가지고 법정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히 9:27).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듯 죽음 후에는 분명히 심판이 있다. 다니엘서 8장은 모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심판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엄숙한 일이다. 그것은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심판의 결과에 모든 것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언제 어디서 두 번째 계시를 받았는가?
“나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이상 후 벨사살 왕 삼년에 다시 이상이 나타나니라 내가 이상을 보았는데 내가 그것을 볼 때에 내 몸은 엘람도 수산 성에 있었고 내가 이상을 보기는 을래 강변에서니라” (단 8:1, 2).
다니엘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 재위 3년이 되는 기원전 551년경에 두 번째 계시를 받았다. 계시 가운데 그는 페르샤의 한때 수도였던 수사(Susa)에 있었는데, 3년 전인 벨사살 원년에 받은 다니엘서 7장의 계시의 연속으로 “다시 이상이 나타”났다.
계시 가운데 동쪽에서 나타난 첫 번째 짐승은 무엇이며 어느 나라인가?
“내가 눈을 들어 본즉 강가에 두 뿔 가진 수양이 섰는데 그 두 뿔이 다 길어도 한 뿔은 다른 뿔보다도 길었고 그 긴 것은 나중에 난 것이더라” (단 8:3).
“네가 본 바 두 뿔 가진 수양은 곧 메대와 바사 왕들이요” (단 8:20).
계시 가운데 나타난 첫 번째 짐승은 수양이었는데, 천사는 확실하게 “두 뿔 가진 수양은 곧 메대와 바사페르샤” 라고 해석했다. 2장에서는 양팔 가슴으로 7장에서는 몸 한편을 든 곰으로 나타났던 메대 · 페르샤가 8장에서는 길이가 다른 두 뿔을 가진 수양으로 표현되었다. 나중에 난 뿔이 더 길었다는 표현처럼 처음에는 메대가 주도했으나 나중에는 페르샤에 의해 두 나라가 통일되었다. 같은 아리안족이면서 친족이기도 한 두 나라는 공존하였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수양의 활동 범위와 방향에 대한 어떤 언급이 있는가?
“내가 본즉 그 수양이 서와 북과 남을 향하여 받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하나도 없고 그 손에서 능히 구할 이가 절대로 없으므로 그것이 임의로 행하고 스스로 강대하더라” (단 8:4).
동쪽 이란에 자리 잡은 페르샤는 주로 서쪽의 나라들을 정복하는 서방공략에 나서 바벨론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고레스(Cyrus)에 의한 기원전 547년의 리디아(Lydia) 정복과 539년의 바벨론 정복은 서방 공략이었으며, 기원전 525년경 그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에 의한 이집트와 에디오피아 정복은 남방 공략이었고, 다리우스 1세(Darius Ⅰ)에 의한 기원전 513년의 스키디아 정복은 북방 공략이었다.
서쪽에서 두 번째 등장한 짐승은 무었으며 어느 나라인가?
“내가 생각할 때에 한 수 염소가 서편에서부터 와서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아니하며 그 염소 두 눈 사이에는 현저한 뿔이 있더라” (단 8:5).
“털이 많은 수염소는 곧 헬라 왕이요 두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곧 그 첫째 왕이요” (단 8:21).
서쪽에서 두 번째로 등장한 수 염소는 페르샤의 서쪽에 위치한 헬라(Hella), 곧 그리스라고 해석되었다. 그리고 수 염소의 두 눈 사이에 돌출(突出)한 큰 뿔은 그리스를 통일한 손꼽히는 왕인 알렉산더 대왕을 적절히 가리킨다. 다니엘서 7장에서는 새의 날개가 달린 날랜 표범으로 나타난 그리스가 8장에서는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빨리 달리는 수 염소로 표현되었다.
동편에서 나타난 수양(메대 · 페르샤)과 서편에서 나타난 수 염소(그리스)의 역사적인 대결이 어떻게 예언되었는가?
“그것이 두 뿔 가진 수양 곧 내가 본 바 강가에 섰던 양에게로 나아가되 분노한 힘으로 그것에게 달려가더니 내가 본즉 그것이 수양에게로 가까이 나아가서는 더욱 성내어 그 수양을 쳐서 그 두 뿔을 꺾으나 수양에게는 그것을 대적할 힘이 없으므로 그것이 수양을 땅에 엎드러뜨리고 짓밟았으나 능히 수양을 그 손에서 벗어나게 할 이가 없었더라” (단 8:6, 7).
페르샤와 그리스 사이의 해묵은 적대적인 관계는 다년간에 걸친 치열한 전쟁으로 표현되었다. 세계사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페르샤 전쟁, 마라톤 경기의 유래가 된 마라톤 전쟁, 데르모필래 전쟁과 알렉산더 즉위 후에 치러진 그라니쿠스 결전(334년 BC), 이수스 대전(333년 BC) 등은 “더욱 성내어” 페르샤를 “땅에 엎드러뜨리고 짓밟”은 그리스의 모습과 “대적할 힘이 없”어 쓰러진 페르샤의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수양을 쓰러뜨린 후 한참 강성해 가던 수 염소(그리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수 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꺽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 (단 8:8).
기원전 331년 수 양인 페르샤를 쓰러뜨린 수 염소 그리스가 한참 강성할 때 “현저한 큰 뿔”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이 33세를 일기로 요절함으로써 세계 역사는 돌변하게 된다.
큰 뿔인 알렉산더가 꺾인 후 그 대신 하늘 사방으로 자라난 네 뿔은 무엇인가?
이미 연구한 7장에서 그리스를 상징한 표범에게 머리 넷이 있은 것과 꼭 같은 내용이다. 젊은 나이의 알렉산더 대왕이 왕위를 이을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기원전 323년 갑자기 쓰러진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차지하려는 힘센 자들의 각축이 22년간이나 계속된 끝에 기원전 301년 입수스(Ipsus) 전쟁을 계기로 그리스는 알렉산더의 네 장수에 의하여 “하늘 사방”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은 셀루쿠스, 서는 캇산더, 남은 프톨레미, 북은 리시마쿠스에 의하여 분할됨으로써 다니엘서의 예언을 정확히 성취시켰다.
이 작은 뿔은 무엇이며 또 그 뿔의 활동 배경과 방향은 어떠했는가?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편과 동편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9단 8:9)
7장의 예언과 비교하여 볼 때, 네 머리를 가진 표범의 나라 그리스 다음에는 열 뿔을 가진 무서운 짐승인 로마가 나타나고 그 후에 열 뿔로 나누인 열 나라 가운데서 작은 뿔인 로마교황권이 등장하여 중세기를 주도한다. 그런데 왜 8장에서는 그리스가 사분된 다음 곧바로 로마 교황권을 상징한 작은 뿔이 나타나는가?
흥미 있는 사실은, 다니엘 선지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로마와 로마 교황권의 역사와 역할을 동일 선상에 두고 8장의 예언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처음에는 작게 출발한 라틴민족의 나라 로마는 먼저 남방을 향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다투던 이탈리아 반도 남쪽 카르다고(Carthago)를 정복하고(146년 BC) 셀루커스왕조(시리아)의 위협을 받고 있던 남방의 이집트를 장악했으며(30년 BC), 동방으로 진출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고국인 마케도니아를 패망시키고(168년 BC) 시리아를 정복했다(64년 BC). 이어서 “영화로운 땅” 예루살렘과 성전을 유린함으로써(63년 BC) “남편과 동편과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겠다는 예언대로 작은 나라로 출발했던 로마는 “심히 커져” 대제국으로 자라났다.
작은 뿔의 활동 방향이 갑자기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 중에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단 8:10, 11).
“그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그가 장차 비상하게 파괴를 행하고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하리라” (단 8:24).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직적 활동을 시작한 작은 뿔이 행할 어떤 다른 일이 예언되어 있는가?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범죄함을 인하여 백성과 매일 드리는 제사가 그에게 붙인 바 되었고” (단 8:11, 12).
하나님을 대적하는 작은 뿔이 하나님께 속한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선 “매일 드리는 제사”라고 표현된 히브리 원어는 “타미드”(tamid)인데, “계속적으로”, “언제나”라는 뜻으로서, 성소에서 끊임없이 수행되는 모든 성소 봉사를 가리키는 말이며 “제사”라는 말은 번역 상 첨가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신 이후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하늘에 있는 참 성소에 들어가셔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를 가지고 인간의 속죄를 위하여 봉사하고 계신다.그리하여 구약시대에 인간 제사장들이 지상 성소에서 짐승의 피로 죄인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리던 임시방편의 제도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폐지되고 지상 성소는 하늘 성소로 대치되었다 (히 9:11~14, 24~26).
그 러나 로마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와는 달리 성경적인 예배가 아니라 이미 폐지된 구약의 제사인 미사(Mass)를 계속하고 있으며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이 사제(司祭)의 축도에 의해 곧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히 4:14~16) 대신 마리아를 중보로 삼아 기도를 드리게 하고 인간 제사장인 사제(priest)를 세워 죄인으로 고백성사를 하게 하는 등 엄청난 일을 함으로써,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성소 봉사를 무용하게 하고 하늘에 있는 참 성소를 훼파하는 참람된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 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작은 뿔에 의하여 극도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어떤 긴박한 질문이 제기되었는가?
“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단 8:13).
천사로 이해되는 “거룩한 자”들의 대화를 통해 다니엘이 궁금해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성도를 핍박하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성소를 유린하고 성소 봉사를 훼방하는 치명적인 작은 뿔의 “망하게 하는 죄악”이 언제까지 용납될 것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서 8장 13절에서 질문된 “어느 때까지”(until when)는 무슨 뜻인가. 우리는 앞서 연구한 다니엘서 7장에서 사자(바벨론) → 곰(메대 · 페르샤) → 표범(그리스) → 무서운 짐승(로마제국) → 열 뿔(열 나라) 사이에서 출현하여 중세기 1260년간을 주도한 작은 뿔(로마교황권) → 책들을 펴놓고 시행하는 재림 전 조사심판 →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서로 진행될 구원의 역사를 보았다. 다니엘은 천사의 설명을 통하여 작은 뿔의 활동과 활동 기간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제 다니엘이 알고 싶어 한 것은 작은 뿔의 활동 기간인 중세기 “한 때, 두 때, 반 때” 이후에 있을 심판과 세상 끝에 관한 내용임이 분명하다. “망하게 하는 죄악”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그리스도의 표현과 같은 것으로(마 24:15), 우상숭배나 신성모독 등 하나님께만 합당한 예배와 거룩하신 속성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참람된 본질을 총체적으로 일컫는다.
이처럼 심각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인가?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단 8:14).
“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니라” (단 8:26).
참람되게 행하는 작은 뿔의 활동 기간인 중세기 1260년 이후에 있을 심판의 때에 관한 대답이 “2300주야까지”이므로 2300주야라는 기간은 1260년 기간을 넘어가는, 보다 긴 기간인 것을 쉽사리 알게 된다. 따라서 2300주야에 관한 예언이 확실하다는 사실과 함께 그것이 “여러 날 후, 곧 마지막 때”의 일임을 밝히면서 지금으로서는 그 계시를 그저 닫아두고 간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직 더 깨달아야 할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음에 연구할 9장의 내용이다.
2300주야에 관한 계시를 본 후 다니엘은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는가?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알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단 8:27).
다니엘은 7장의 계시에 이어 주어진 8장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역사와 특히 작은 뿔의 세력에 의해 참으로 오랜 동안 무서운 박해와 시련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기진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다. 특별히 이와 관련해서 “1260일” 기간보다 더 긴 “2300”주야 기간이 소개되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음은 더욱 초조했다. 이에 대한 대답이 9장에서 주어질 것이다.
“2300”주의 실제 기간은 얼마인가?
이곳에서의 “주야”는 우리말 표현처럼 “낮과 밤”의 순서가 아니라, 히브리 원어의 “에레브(ereb) 보케르(boqer)”로서 “저녁과 아침”(evenings and mornings)의 순서이다. 이러한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완전한 하루를 나타낼 때 “저녁(ereb)이 되며 아침(boqer)이 되니” (창 1:5, 6)와 같은 순서와 표현이다. 즉 2300주야는 완전한 2300일인 것이다.
그런데 2300일도 1260일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예언에 쓰여진 기간이므로 「연일 원칙」에 따라(민 14:34 ; 겔 4:6), 2300일은 2300년이 되는 것이다. 이 기간의 시작과 끝에 관한 중요한 내용과 성소가 정결해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깊은 연구는 9장에서 계속되겠지만 우선 이제부터 연구 주제가 된 성소가 무엇인지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자. 왜냐하면 거기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속죄와 심판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7장에서 연구한 재림 전에 있을 심판과 8장에서 방금 연구한 성소의 정결은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일치하게 되는가?
7장에 소개된 대로 재림 전에 있게 될 성도를 위한 조사심판의 내용이 8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어 그것이 성소가 죄로부터 정결해지는 의식이 행해지는 구약의 대속죄일에 해당되는 심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97쪽에 제시된 대로 7장과 8장의 심판이 동일함을 확인해보자.
진 화론자인 영국의 헉슬리(T. Huxley)교수가 강연 약속을 위해 더블린에 도착하여 급히 마차를 탔다. 한참을 달렸으나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자, 초조해진 헉슬리는 마부에게 다그쳐 물었다.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소?” “저는 모릅니다. 선생님께서 시간이 급하니 빨리 달리라고만 하셨지 어디로 가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저는 그저 빨리 달리기만 합니다.” 바쁘게 살다보니 사는 목적을 잊어버리고 뜻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오늘날의 개인과 세상의 허망한 모습을 말해 주는 이야기이다.
두 번에 걸친 다니엘서 7장과 8장의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세상의 역사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저 바쁘고 어수선하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언에 나타난 대로 질서가 있고 결론이 있는 시간의 진행인 것이다. 확실해진 사실은 개인과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는 선과 악을 판별하는 심판이 있고 그 결과에 따라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영원한 보응이 있는 것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분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3, 14).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하더라” (계 14:7).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0).
나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이 엄숙한 심판을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구원의 계획과 시간표
주제절 :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단 9:23).
어떤 상황에서 고령의 다니엘이 또다시 금식하며 기도드리게 되었는가?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단 9:1, 2 상단).
이때는 바벨론이 멸망한 이듬해인 기원전 538년경으로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으로 즉위한 해로서, 다니엘서 6장의 기도 금지령과 사자굴 사건이 일어난 같은 때이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면서까지 기도드려야 했던 사연과 기도의 내용이 9장에 공개되어 있다.
이 때 다니엘이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은 무엇이었는가?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단 9:2).
다니엘은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과거에 불순종을 거듭한 동족 유대인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일찍이 예언하신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거의 마쳐지고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다니엘 자신이 잡혀온 기원전 605년부터 시작된 70년 포로 기간이 다음해인 537년에는 끝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의 마음은 더욱 착잡하고 촉급해졌다.
다니엘은 무슨 목적으로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렸는가?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단 9:3).
동족 유대인이 70년간 포로살이를 해야 한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이었다. 그러나 70년 포로 기간이 끝나 가는 지금 그들은 아직도 철저히 회개하지 않았으며 어서 고국으로 돌아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신속히 복구하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해야 할 사명을 잊어버리고 어느새 익숙해진 포로살이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포로된 백성들이 어서 돌아가고 황폐된 예루살렘과 성전이 신속히 복구되어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기를 탄원했다. 자신은 허물이 없을 만큼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하고 백성의 속죄와 예루살렘의 회복을 탄원한 다니엘의 기도는 참으로 위대하기 그지없는 영혼의 절규였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단 9:17~19).
이처럼 위대한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위대한 반응을 하셨는가?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단 9:21~24).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늘은 땅에서 멀지 않다. 응답은 신속하고 확실했다. 하늘의 최고 천사로 알려진 가브리엘(Gabriel)이 기도가 시작되자마자 파송되었으며 다니엘에게 자신이 온 목적을 알렸다. 참으로 인간의 위대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응답이었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사명이 다니엘이 깨닫지 못한 이전에 받은 “그 이상”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니엘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그 이상”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단 8:14).
“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니라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단 8:26, 27).
우리가 앞서 연구한 8장에서 다니엘이 하나님께 받았으면서도 깨닫지 못한 특별한 계시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2300주야에 대한 이상계시” 이었다. 그 계시는 그 충격으로 다니엘이 여러 날 병석에 누울 만큼 중요한 것이었으나 아무도 깨달을 수 없는 난해한 내용이었다. 다니엘은 이 특별한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용어까지 썼다. 즉 지금까지 받은 이상은 히브리어로 “하존”(chazon)이란 용어를 썼는데, 계시 중에 그리스도나 천사가 직접 “나타나” 전달해준 8장 14절의 2300주야에 대한 이상은 “마레”(mareh)라는 말을 써서 구별했다.
실제로 8장 14절의 계시가 주어질 때도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었고(8:17), “마레”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쓰여 졌고(8:15, 16, 26, 27), “깨달으라”는 표현이 거듭 쓰여 졌는데, 그 해석이 주어지는 9장에서도, 가브리엘이 다시 나타났고(9:21), 특수 용어 “마레(이상”가 다시 쓰여 졌고(9:23), 전에 깨닫지 못한 “그 이상”을 “깨달으라”는 지시가 주어졌다. 이와 같이 9장은 다니엘이 8장에서 깨닫지 못한 “2300주야에 대한 이상”을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해석해 주시는 내용임이 확실해졌다.
“2300주야에 대한 이상”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단 9:24 상단).
고령의 다니엘이 포로의 땅에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염려하는 것은 동족 유대인과 고국 유다였다. 그것은 단순한 애국애족 이상의 뜻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함으로 멸망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구주를 보내시고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구원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일찍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을 택하셨기 때문에(창 12:1~3, 49:8~10) 구약시대에는 세상의 운명이 유다 나라와 유대인에게 달린 셈이었다. 다니엘이 8장의 “2300주야에 대한 이상”(8:14, 26)을 받고 그토록 충격을 받고 몸져누운 것이나 9장에서 유대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며 금식기도를 드린 것도 모두 같은 심정에서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다니엘의 일차적인 관심사인 “네 백성유대인과 네 거룩한 성예루살렘”의 장래 운명부터 설명이 시작된다.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다는 뜻이 무엇인가?
“이레”는 “7일”로서 “1주일”을 의미한다. 그런데 상징적인 예언에서는 언제나 1일을 1년으로 해석하는 법칙이 있기 때문에(민 14:34 ; 겔 4:6), 이 경우에도 7일은 7년이 되어 “70이레”, 즉 “70주일”은 70X7=490년으로 환산되어야 마땅하다. “정하였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타크”인데 “자르다(cut)”, “잘라내다(cut off)”는 뜻으로 “할당”과 같은 말이다. 어디서 잘라냈는가. 9장이 8장의 “2300주야에 대한 이상계시”의 해석임이 확실함에 따라 70주일은 2300주야에서 잘라낸 부분임이 분명해진다.
70주일 490년이 “네 백성”, 즉 유대인을 위해 특별히 할당된 이유는 무엇인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9장의 70주일은 8장의 2300일 기간의 일부로서 범죄 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유대인이 해야 할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특별히 떼어놓은 기간이란 뜻이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는 마치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먼저 의과대학을 세우고 사람을 선발하여 적어도 8년 이상 교육을 시켜 의사를 배출하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해 먼저 교육대학을 세우고 사람을 선발하여 적어도 4년 이상 교육을 시켜 교사를 양성하듯이 세상에 구원을 이루기 위해 유대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선택하시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선교사의 나라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동안 불순종과 반역을 거듭함으로써 택한 백성의 사명을 이루기에 실패한 유대인들에게 70주일 490년은 마지막 은혜의 기간이었다.
70이레주” 동안 인류의 구원을 위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위의 성경절에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성을 위해,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할당된 70주일, 곧 490년 동안 이루어지도록 계획되거나 예언된 일들이 열거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이제까지의 불순종과 반역을 그치고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죄인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구원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지만 실제의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인류의 죄를 합법적으로 속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입증하셨다.
10.70주일490년 기간에 이상과 예언이 응”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 45)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확증하셨듯이 구약 성경은 모두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든 예언들이 유대인에게 할당된 70주일490년 기간에 포함된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통해 실제로 낱낱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예언이 이루어짐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마무리 짓는 재림이 있기까지의 그리스도의 모든 봉사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70주일 490년 기간에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모세가 관유를 취하여 장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레 8:10).
이곳에 쓰여진 “거룩한 자”는 히브리어로 “코데슈 카다쉼”인데, “지극히 거룩한 것”이란 뜻으로서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고 전적으로 성소와 거기에 관련된 기구나 봉사에 사용된 말이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성소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성소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모세에 의하여 장막으로 된 최초의 성소가 세워진 후 봉사를 시작할 때 거기에 성령을 상징하는 거룩한 감람열매 기름을 부어 성별했다. 꼭 같은 일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후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성소에서 봉사를 시작하실 때에 성취될 것으로 (히 4:14~16) 예고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성취시킬 예비 기간인 70주일은 언제 시작되는가?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단 9:25).
9장의 계시가 주어진 기원전 538년 당시의 예루살렘은 과거 바벨론에 의해 파멸된 이래 아직도 폐허로 남아 있었다. 다니엘은 그러한 예루살렘과 성전의 중건을 탄원하고 있었다. 그러한 예루살렘을 이전처럼 다시 회복시키라는 왕의 명령이 날 때부터 70주일 기간이 시작된다는 기산점이 설정된 것이다.
여기에 쓰여진 “중건”이란 표현의 히브리어는 “슈브”(shub)와 “바나”(banah)라는 두 마디 동사인데, “슈브”는 본래의 상태로 “회복하다”(restore)는 뜻이고, “바나”는 “세우다,” “짓다”(build)는 뜻이어서,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고 이전 상태로 회복하라”는 뜻이다.
70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예루살렘 “중건”의 내용을 만족시키는 왕의 조서가 언제 내려졌는가?
“아닥사스다왕 7년에 ···여화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의 학사인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왕이 내린 조서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스 7:7, 11).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페르샤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여 필역하되” (스 7:14).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내용에는 무너진 성전뿐만 아니라 폐허가 된 성읍의 복구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자치권의 부여도 전제되어 있다. 이 일을 위한 세 명의 페르샤 왕들의 조서는 고레스 원년 (537년 BC), 다리우스 1세 제 2년(520년 BC), 아닥사스다 제7년(457년 BC), 아닥사스다 제 20년의 추가 조서(444년 BC) 등이 있었으나, 다니엘서 9장 25절에 예언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조서는 기원전 457년에 내린 아닥사스다 왕 제7년의 조서였다(스 4:12, 13, 7:7~26).
기원전 457년이 70주일의 정확한 시작임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이 사실은 종교개혁 이래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누차 확인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Isaac Newton)이다. 그는 20개 이상의 고대 일식 기록을 조사하여 페르샤 왕 아닥사스다 제7년이 기원전 457년임을 천문학적으로 확증했으며, 근년에 발견된 고대 페르샤의 엘레판틴(Elephantine) 파피루스 문서에서도 이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70주일이 마쳐질 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는가?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 되었느니라” (단 9:26).
다니엘의 예언에 의하면, 기원전 457년에 시작된 70주일(490년) 기간 가운데 7주일(49년)과 62주일(434년)이 마감되는 서기 27년에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메시야의 일을 시작하신 이후 갑자기 “끊어져 없어지”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그 일이 침례 받으신 후 1주일(7년)의 절반인 3년 반이 지난 서기 31년에 예수께서 돌연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정확히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끊어져 없어”진 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한 왕의 백성”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을 끝내 거절하고 죽인 결과로 초래될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파멸을 미리 말씀하실 때 다니엘서 9장 26절의 성취를 아래와 같이 생생히 인용하셨다.
다니엘서에 예언된 예루살렘의 멸망이 실제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15, 16, 20).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결과였으며 다니엘서에 예언된 그대로 이루어졌다. 거듭해서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징벌하기 위해 서기 67년부터 3년간이나 계속된 로마의 명장 베스파시안(Vespasian)의 공격은 유다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서기 70년 그의 아들 타이터스(Titus) 장군이 거느린 8만 명의 로마 군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5개월간의 포위 끝에 110만 명의 유대인이 무참히 죽었으며 9만 7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분노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을 불바다가 되어 깡그리 파괴됨으로써 문자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는 그리스도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그러나 다니엘서를 직접 인용하여 경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포위가 시작되기 직전에 미리 도망하여 파멸을 면했다.
17 세기 영국의 물리학자요 수학자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우주시대의 기초를 놓은 뉴턴 경(Sir Isaac Newton)은 다니엘서 등 예언서 연구에 있어서도 뛰어난 신학자였다. 수학자인 그는 다니엘서 9장의 70주일에 나타난 대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하여 예언된 연대가 수학적으로 정확함에 대해 경탄하였다. 뉴턴 경 자신이 70주일과 2300주야 예언의 시작이 아닥사스다 왕 7년이고 그것이 기원전 457년임을 일식 기록들을 조사하여 그 정확성을 천문학적으로 입증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모든 사실을 염두에 두며 이렇게 말했다. “다니엘서의 예언을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뒤엎은 일을 하는 셈인데,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리스도에 관한 다니엘의 예언 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도면밀하게 성취되었고 또 마쳐질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의 계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가. 그것은 정확한 것만큼 엄숙한 책임이 따르는 숙명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 와 같이 확실함과 정확함이 입증된 2300주야에 관한 예언이 끝나는 1844년, 승천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죄를 영원히 끝내시기 위해 하늘의 성소를 정결하게 하시고자 구원의 마지막 단계인 대속죄일의 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셨다. 지성소 봉사가 끝나면 인간을 위한 은혜의 시기도 끝나게 되며 세상은 마지막 재앙을 겪게 되고 곧 이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게 된다(계 15:5~8). 아직도 죄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경험을 바로 지금 가져야 한다(레 16:30).
각 시대의 대쟁투
주제절 :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단 10:14)
어떠한 배경에서 다니엘의 마지막 계시가 주어졌는가?
“바사 왕 고레스 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 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깨달으니라 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단 10:1~3).
때는 페르샤의 국부인 고레스 대왕 3년인 기원전 535년경, 다니엘은 그 대 88세쯤의 고령이었다. 그는 아직도 3주일씩 금식하며 기도드리는 왕성한 신앙생활과 공직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로 3주일씩이나 금식하며 기도를 드려야 했는가?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 10:12).
다니엘의 기도에 대하여 천사가 응답한 내용을 볼 때, 다니엘은 장차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성소가 겪게 될 두려운 운명에 대해 심히 근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왜 그랬을까. 2년 전쯤인 고레스 원년에 제1차 석방령이 내렸으나 막상 포로살이를 청산하고 귀국길에 나선 유대인들은 4만 2천 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들마저도 주변 민족들의 반대로 귀국한 지 2년이 지났어도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적대적인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반역으로 이름난 민족임을 예로 들면서 예루살렘 재건을 절대로 허락하지 말도록 페르샤 정부에 탄원과 고발을 계속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중건령을 내렸던 고레스왕의 마음은 뒤숭숭해졌고 자신의 관용책에 대해 우려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처럼 심상치 않은 사태를 감지한 다니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광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할 일이 있음을 깨닫고 힘 있는 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시련에 가득 찬 하나님 백성들의 장래였다.
다니엘의 간절하고 단호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 어떻게 이르러 왔는가?
“정월 이십 사 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단 10:4~6).
언제나 그랬듯이 다니엘의 진실한 기도는 즉시 응답되었다. 다니엘은 3주일간의 금식기도를 끝내고 몇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힛데겔은 티그리스(Tigris) 강의 옛 이름이다.), 바로 그 때 다니엘은 너무나 찬란하여 바라볼 수도 없는 눈부신 영광에 에워싸인 초자연적인 존재를 목도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의 모습이었는데, 1세기말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귀양 가서 계시를 받을 때에 친히 나타내셨던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였다(계 1:12~16).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한 데 대한 인간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단 10:7~9).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날 때 수행원들은 그 영광을 감당할 수 없어 모두 도망쳐 숨었으며, 다니엘도 죽은 사람처럼 몸에 힘이 빠지면서 땅에 엎드러졌고, 기력이 쇠하여 탈진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반응은 하나님의 영광을 접했을 때나 계시를 받을 때 모든 인간들이 나타내는 공통된 반응이다(계 1:17 ; 행 9:3, 4).
5.이 때 누가 나타나 어떤 말로 자신이 온 이유와 사명을 설명했는가?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 10:11, 12).
다니엘에게 나타난 이 천사는 말이 내용이나 앞뒤 문맥을 볼 때, 8장(16절)과 9장(21절)에서도 다니엘에게 나타나 이상을 설명했던 하늘의 최고 천사인 가브리엘임이 틀림없다.
천사는 어떤 놀라운 말로 다니엘에게 기도의 응답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했는가?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단 10:13).
놀랍게도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의 기도는 첫날에 이미 응답되었으나 본의 아니게 지체되어 3주일이 지난 지금에야 자신이 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유인즉, “바사페르샤 국군, 곧 페르샤 나라의 임금]이 지난 3주일 동안이나 내가 하려는 일에 저항을 계속했기 때문에 바로 올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장이신 “미가엘”이 나를 돕기 위하여 왔기 때문에 그분을 거기 머물게 하고 나는 이제야 네게 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은 “페르샤 나라의 임금”은 누구이며, 가브리엘 천사를 도운 미가엘은 누구인가?
페르샤의 “국왕”이 아니고 “국군”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곳의 “군”은 히브리어의 “샤르”인데 왕이 아니라 왕자나 으뜸 되는 지도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군장이신 미가엘(Michael)도 같은 “군”이란 표현을 썼다. “미가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뜻으로, 사단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과의 싸움에 나서실 때 쓰시는 대쟁투적인 명칭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페르샤 국군”은 페르샤의 인간적인 왕이라기보다는, 그 나라 왕들에게 나쁜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악한 천사나 사단의 영을 가리킬 수가 있다. 아니면, 당시 국왕이었던 고레스의 왕자로 유대인을 줄곧 적대했던 캄비세스 2세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마음대로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뜻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그런데 자유없이는 사랑할 수가 없다. 사랑의 최고 표현을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가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자유가 없으면 인간은 한낱 로봇과 같은 조작품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죄 지을 자유까지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범죄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페르샤의 통치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지 않으시고 천사를 통하여 이해를 촉구하고 감화시키려고 최선을 다하셨음을 깨닫게 된다.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대신 자신의 선택과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신다. 그것이 심판의 당위성인 것이다. 만일 칼빈의 예정론처럼, 사람의 구원마저도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결정된다면 심판의 당위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결정할지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단이 함께 배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며,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전개되고 있는 선과 악의 대쟁투의 진상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니엘의 최고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으며, 천사가 깨닫게 하려는 계시의 주제는 무엇인가?
“바사 왕 고레스 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 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단 10:1 상단).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단 10:14).
이러한 계시가 주어지려 할 때, 다니엘은 또다시 어떤 신체적 반응을 일으켰는가?
“그가 이런 말로 내게 이를 때에 내가 곧 얼굴을 땅에 향하고 벙벙하였더니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섰는 자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주여 이 이상을 인하여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로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단 10:15~17).
“또 사람의 모양 같은 것 하나가 나를 만지며 나로 강건케 하여 가로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가로되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단 10:18, 19).
가브리엘 천사가 기진맥진한 선지자 다니엘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공급함으로써 다니엘은 힘을 얻어 그 이후의 계시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천사는 어떠한 말로 자신의 사명을 다니엘에게 확인시켰는가?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나아온 것을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과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 군이 이를 것이라”(단 10:20).
당시의 근동세계는 페르샤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한 페르샤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의하여 포로 된 유대인을 석방시키고 예루살렘 성을 회복시킴으로써 곧 이 땅에 태어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게 하셨다. 그 러나 이 일은 사단에 의하여 맹렬한 저항을 받았다. 사단은 이스라엘의 적들과 페르샤 왕들을 충동하여 이 일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인류의 운명이 걸린 이 중대사를 좌시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최고의 천사인 가브리엘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까지 오셔서 페르샤의 위정자들을 감화시켜 하나님의 계획에 협력하도록 촉구하셨으며 다니엘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있었다.
바사페르샤 군이 나간 후에는 헬라그리스 군이 온다는 뜻은 무엇인가?
당시는 페르샤 통치 시대였다. 페르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계획하신 구속 사업이 성취되도록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페르샤 왕들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 나라인 그리스헬라 세력을 불러들여서 페르샤를 역사로부터 퇴출시키실 것이다. 왜냐하면, 한 나라로서 더 이상 존재할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주장하는 불가항력의 변수가 되는 역사 철학인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대쟁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은 누구인가?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 뿐이니라”(단 10:21).
“미가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명칭이다. 하늘에서 대대적인 반역을 일으켰다가 축출된 최고의 천사였던 루스벨(Lucifer)은 사단(Satan)이 되었고 그의 자리는 가브리엘(Gabriel) 천사에 의하여 대치되었다.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이름의 뜻을 지닌 미가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과의 숙명적인 대쟁투를 확실한 승리로 이끄실 것이다. 그는 선의 편을 택한 모든 사람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끝까지 도우실 것이다.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들
주제절 :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단 10:14)
어떠한 배경에서 11장에 기록된 다니엘서의 마지막 예언이 계속되고 있는가?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단 10:14)
“내가 또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 일어나 그를 돕고 강하게 한 일이 있었느니라”(단 11:1).
다니엘은 7장의 “한 때, 두 때, 반 때”에 관한 계시 이후부터 하나님 백성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7:28). 그 걱정은 8장의 “2300주야”에 관한 예언이 주어지면서 더욱 깊어졌다(8:27). 9장의 “70이레”에 관한 예언을 통해 일부의 문제를 깨달았으나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라는 예고는 그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9:26 하단). 이제 10장에서 이 “큰 전쟁에 관한” 계시와(10:1), “말일”에 “네 백성”곧 하나님의 “백성이 당할 일”이 상징이 아니라, 서술 형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10:14). 이 계시를 전달하고 있는 천사는 자신이 다니엘이 기도 금지령을 어긴 탓으로 사자굴에 던져지던 다니엘서 6장의 사건 때 다니엘이 살아 나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가브리엘 천사임을 스스로 소개했다.
계시가 주어지던 당시인 페르샤의 초기부터 그리스가 일어날 때까지 어떤 역사가 계속될 것인가?
“이제 내가 참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보라 바사페르샤에서 또 세 왕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넷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그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을 격동시켜 헬라국그리스을 칠 것이며”(단 11:2).
계시가 주어진 당시는 페르샤의 국부 고레스 시대였으므로, 그 후에 페르샤에서 일어날 “세 왕”과 “넷째 왕”은 역사적으로 아래와 같다.
첫째왕 : 캄비세스 2세 – 고레스의 아들로서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 유능한 동생 스메르디스를 몰래 죽여 후환을 없애려 했으나 자신이 오히려 귀국 길에 변사했다.
둘째왕 : 가짜 스메르디스 -캄비세스가 이집트 원정에 나간 동안 자신을 캄비세스의 동생인 스메르디스라고 사칭한 바르디야(Bardiya)가 왕위를 찬탈했다.
셋째왕 : 다리우스 1세 -가짜 스메르디스(Smerdis)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재위 2년에 중단된 예루살렘 성전 중건령을 내렸다.
넷째왕 : 크세르크세스 -다리우스 1세의 아들로 에스더의 남편인데 성경에는 아하수에로 왕으로 나온다. 4년간의 전쟁 준비를 끝내고 그리스를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기세로 대원정에 나섰으나 패전하였다. 그 후 몇 명의 왕이 더 일어나 그리스 원정을 계속했으나 오히려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어떤 특별한 인물이 등장할 것으로 예언되었는가?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임의로 행하리라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이 외의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니라”(단 11:3, 4).
페르샤가 주도하던 그리스 정복의 끈질긴 시도는 마침내 헬라(그리스)의 “한 능력 있는 왕” 알렉산더 대왕이 일어나면서 졸지에 역전되고 말았다.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던 헬라 반도를 통일한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는 3만 5천 명의 소수 정예부대를 이끌고 숙적 페르샤 정복 길에 올랐다. 그는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진격하였으며 기원전 331년 페르샤를 멸망시키고 내친 발걸음으로 서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정복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창 “강성할 그 때”인 33세가 되던 해 갑자기 요절함으로써, 다니엘서 7장의 표범에게서 “머리 넷”이 돋아났듯이, 8장의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 현저한 뿔 넷”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듯이, 알렉산더의 대제국은 유복자 외에는 후계자가 없던 상황에서 전혀 “이 외의 사람들”인 그의 네 장군들에 의하여 기원전 301년 입수스 전쟁 이후 정확히 사분됨으로써 예언을 문자 그대로 성취시켰다.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넷으로 나누어진 그리스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는가?
“남방의 왕은 강할 것이나 그 군들 중에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그 권세가 심히 클 것이요”(단 11:5)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네 장군들에 의해 사분 된 네 나라 가운데,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맡았던 캇산더와 소아시아를 맡았던 리시마쿠스의 나라는 얼마 못 되어 종말을 고하고, 125쪽에 제시된 지도에 나타난 대로 시리아 쪽을 맡았던 셀루쿠스 왕조와 이집트를 맡았던 프톨레미 왕조가 맞대결 하는 남북왕조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인 팔레스틴에 위치한 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 셀루쿠스 왕조의 시리아는 북방 왕이었으며 프콜레미 왕조의 이집트는 남방 왕이었다.
11장 5절의 최초의 남방 왕은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가운데 하나로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미 1세(Ptolemy I)이며, 그 “군들 중의 하나”는, 한때 불리한 상황에 처하여 남방 왕 프톨레미의 수하에 있었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진 첫 번째의 북방 왕 셀루쿠스 1세(Seleucus I)로서 시리아를 비롯하여 이전의 알렉산더 대왕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이후의 근동 역사를 이끌어 간 남방 왕인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북방 왕인 시리아의 셀루쿠스 왕조를 대배한 것인데 다니엘서 11장에 언급된 왕들만 뽑은 것이다. 성경에 이들의 존재와 역할이 예언을 통해 이처럼 상세히 언급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후에도 남방 왕 이집트와 북방 왕 시리아는 어떻게 끝없는 보복 전쟁을 계속했는가?
예언된 대로 남북왕조의 보복적인 대결이 계속되었는데, 이 사실을 예언한 성경절에 그대로 역사를 대입하여 예언의 정확성을 성경 본문에서 확인해보자.
“그 아들들시리아 왕 셀루쿠스 2세의 두 아들인 셀루쿠스 3세와 안티오쿠스 3세이 전쟁을 준비하고 심히 많은 군대를 모아서 물의 넘침 같이 나아올 것이며 그가 또 와서 남방 왕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요 남방 왕프톨레미 4세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 왕안티오쿠스 3세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가 그프톨레미 4세의 손에 붙인 바 되리라 그프톨레미 4세가 큰 무리를 사로잡은 후에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 수만 명을 엎드러뜨릴 것이나 그 세력은 더하지 못할 것이요”(단 11:10~12).
위에 인용된 세 구절의 성경 예언은 북방 왕 시리아와 남방 왕 이집트가 7만 명의 보병과 5천 명의 기병, 코끼리까지 총동원하여 기원전 217년 라피아(Raphia)에서 벌였던 대접전의 사기를 읽는 것 같다.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에 의하여 미리 기록된 역사인 것이다. 이 전쟁에서 양측은 엄청난 사상자와 포로를 낸 후에 남방 왕의 승리로 끝났다.
그동안 북방 왕 시리아와의 싸움에서 우세를 유지해 온 남방왕국 이집트가 어떤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가?
“북방 왕은 돌아가서 다시 대군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 그 때에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남방 왕을 칠 것이요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이상을 이루려 할 것이나 그들이 도리어 넘어지리라”(단 11:13, 14).
라피아 전투에서 대패한 북방 왕인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는 심기일전하여 동방 공략에 나서 알렉산더 대왕의 이전 영토를 대부분 탈환하는 전과를 올린 후 남방으로 기수를 돌려 이집트와의 재대결을 감행했다(13절). 이 때 안티오쿠스 3세는 마케도니아 왕 필립 5세와 동맹을 맺어 세력을 보강한데다가 이집트 본토인들은 이족인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에 저항하기 시작함으로써 남방왕국 이집트는 내우외환에 처했다(14절 상단).
기원전 198년 북방 왕 안티오쿠스 3세는 파내우스(Panaeus) 싸움에서 이집트에 승리함으로써 백년 이상 남방 왕 이집트의 지배를 받아 온 유다를 북방 왕 시리아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 사실이 “네 백성유대인의 파괴자들the breakers of your people, 곧 남방 왕 이집트이 옮겨지리라(shall be lifted up)”는 뜻이 된다. 또한 남방 왕 이집트와 북방 왕 시리아에 이어 유다를 침입하여 속국으로 만든 로마를 적절히 가리킬 수도 있다.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the robbers of your people)는 히브리어 문법으로 “네 백성들의 파괴자”라는 뜻도 가능하다.
남방 왕 이집트와 북방 왕 시리아의 마지막 숨가쁜 대결이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가?
“이에 북방 왕은 와서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을 취할 것이요 남방 군대는 그를 당할 수 없으며 또 그 택한 군대라도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단 11:15).
안티오쿠스 3세에 이어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된 후에도 남방 왕 이집트에 대한 북방 왕 시리아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특별히 안티오쿠스 4세는 기원전 169년 이집트의 견고한 성읍 펠루시움을 함락시켜 삼각주 동부를 공략하는 길을 열었다. 겨울이 오자 그는 시리아로 퇴각했는데 그것이 북방 왕 시리아에 관한 마지막 언급이다. 놀랍게도 이 북방 왕은 “마지막 때”와 연관되어 11장 40절에 다시 나타난다. 15절 이후에는 왜 북방 왕 시리아가 다시 나타지 않는지 그 이유가 16절에서 밝혀진다.
세계 역사에서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그리스의 남북왕조의 싸움이 이렇듯 자세하게 예언된 까닭이 무엇인가?
마지막 때에 관한 다니엘서의 마지막 계시가 주어지기 전, 다니엘이 그토록 괴로워하고 금식하며 알기를 원했던 주제는 시련으로 가득 찬 하나님 백성의 장래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기도의 응답으로, “말일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깨닫게 하”기 위해 가브리엘 천사가 보내져 지금 그 주제에 관한 계시가 12장까지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그 계시는 다니엘 당시인 페르샤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에 이르렀는데, 그리스가 북방의 시리아와 남방의 이집트로 양분되어 생사 대결을 벌이는 그 사이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다가 끼어 있는 상황이다. 이미 페르샤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에 관하여 무서운 적의를 드러낸 사단은 그리스 시대에 이르러서도, 적개심에 사무쳐 보복을 계속하는 북방의 셀루쿠스 왕조와 남방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의 싸움을 고조시켜 중간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을 짓밟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일을 극대화한 것이다.
실제로 북방왕국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 때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다니엘서 11장 15절에 예언상으로는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북방 왕인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는 20명의 시리아의 왕들 가운데 8번째 왕으로 재위 11년(175년~164년 BC) 동안 유다를 헬라화 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조석으로 드리는 상번제를 폐하고, 성전 앞에 우상의 단을 쌓고 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며, 안식일과 할례를 폐하고 하나님 대신 제우스신을 섬기도록 강요했다. 이를 반대한 유대인들을 저항하지 않는 안식일을 택하여 무수히 죽였다. 마침내 시리아에 대항하는 무장 봉기와 함께 마카비의 독립운동이 일어나 끝내 독립을 쟁취했으나 기원전 63년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 탄생 시 까지 그 상태라 계속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예언을 통해 수백 년 전에 기록된 까닭은 그것이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게 될 유다의 운명에 직접으로 관계돼 있기 때문이다. 안티오쿠스 4세의 이러한 악역때문에, 상당수의 학자들은 그를 다니엘서 8장의 작은 뿔로 해석하고, 11장 16~39절의 주역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은 전혀 합당치 않은 해석이다. 왜냐하면 그는 북방 왕 시리아의 “마지막 때” 왕이 아니라(8:23) 20명의 왕들 중 8대 왕이며, 그는 “심히 커”진 왕국의 왕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에 의해 위축당한 취약한 왕이었다. 또한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유린한 기간도 엉뚱하게 적용한 2300일이 아니라(8:14) 실제로는 3년 10일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이와 관련된 예언을 예수 그리스도 당시 이후인 예루살렘 멸망에 직접 적용시키심으로(단 9:27) 그러한 헛된 주장의 여지를 없애셨다.
그리스의 남북왕조 시대를 끝낸 신생 강대국 로마의 등장이 어떻게 예언 되어 있는가?
“오직 와서 치는 자가 임으로 행하리니 능히 그 앞에 설 사람이 없겠고 그가 영화로운 땅에 설 것이요 그 손에 멸망이 있으리라”(단 11:16).
앞서 연구한 11장 15절에서 북방 왕 시리아는 남방 왕 이집트를 거의 승복시킬 것처럼 묘사되었다. 그러나 16절에서 감자기 사태가 달라진다. 무적의 “와서 치는 자침략자” 가 등장하여 세상을 뜻대로 다스린다는 직설적인 예언이다. 기원전 168년 안티오쿠스 4세가 아버지 안티오쿠스 3세의 유지를 받들어 이집트로 진격해 가고 있을 때, 로마에서 특사가 와서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자 그는 순응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기원전 168년 로마에 의해 알렉산더의 고국인 마케도니아가 망하고, 시리아가 이집트에서 퇴각하고, 이집트는 보호령이 됨으로써 그리스 시대는 끝나고 로마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로마는 기원전 64년 마침내 북방 왕 시리아를 정복한 후 로마의 일개 주로 복속시켰으며, 이듬해인 63년에는 폼페이(Pompey)에 의해 “영화로운 땅”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성전이 유린되었으며, 12,000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하고 독립을 상실한 채 로마의 속주가 되고 말았다. 15절의 예언이 정확히 성취된 것이다.
시리아와 유다를 멸망시킨 로마의 발걸음이 어떻게 이집트까지 이르게 되는가?
“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가 그와 화친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을 그에게 주어 그 나라를 패망케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 (단 11:17).
16절에서 예언된 대로 시리아를 거쳐 유대까지 이른 로마의 정복의 발걸음은 남하를 계속했다. 삼두정치를 펼쳐온 크라수스가 전사하고, 폼페이와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가 반목하면서 폼페이가 이집트로 패퇴하자 줄리어스는 그를 추격하여 거기서 죽였다. 이집트에 오게 된 줄리어스 시이저는 거기서 프톨레미 11세의 딸로 남동생과 왕위 다툼을 하던 22세의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황홀한 사랑에 빠져들었다. “여자의 딸”(the daughter of women)은 “빼어난 여자”를 뜻하는 말로 세계사의 절세미인 클레오파트라에게 적합한 표현이다.
그러나 왕위와 인간의 욕망을 함께 이루려 했던 클레오파트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아들까지 낳은 터에 남편이 된 줄리어스 시이저를 따라 로마까지 갔으나 얼마 후 그가 암살당하자 그는 황급히 이집트로 도망쳐 왔으며, 결국에는 독사에 몰려 자살하게 되는 비극의 여인이 된다. “그에게 무익하리라”는 예언의 성취였다. 그것이 기원전 30년의 일로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남방 왕 이집트도 끝나게 된다.
율리어스 카이사르의 운명에 관한 어떤 놀라운 예언이 기록돼 있는가?
“그 후에 그가 얼굴을 섬들로 돌이켜 많이 취할 것이나 한 대장이 있어서 그의 보이는 수욕을 씻고 그 수욕을 그에게로 돌릴 것이므로 그가 드디어 그 얼굴을 돌이켜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 (단 11:18, 19).
50세가 넘은 율리어스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심상치 않은 국제 정세를 의식하여 해안 길을 따라 귀국하였다. 그는 도중에 보스포러스, 북아프리 카, 스페인 등 적어도 세 곳에서 전쟁을 치르며 로마로 개선 입성하였다. 그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간결한 세 마디 메시지를 원로원에 보낼 만큼 원숙한 정치인이자 군인이 되어 있었다. 율리어스 카이사르는 결국 종신 독재관이 되어 로마의 1인 지배자로 득세하였으나 그의 거만함과 잔혹함은 자신의 머리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의 수욕을 씻을 대장”, 롱기누스 (G. Cassius Longinus)가 지휘하는 60여 명의 동료 로마인들은, 황제가 되려는 율리어스의 야심을 간파하고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에서 그를 무참하게 암살하여버린 것이다. “브루터스(Brutus), 너까지도···” 그것이 절친한 친구의 손에 죽은 율리어스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었다. 예언대로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게” 된 것이다.
율리어스 카이사르 다음에 누가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는가?
“그 왕위를 이을 자가 압제자를 그 나라의 아름다운 곳으로 두루 다니게 할 것이나 그는 분노함이나 싸움이 없이 몇 날이 못되어 망할 것이요”(단 11:20).
율리어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사람은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이다. 그가 바로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Augustus Caesar, 아구스도)이다. “토색하는 자”는 “세금을 거두는 자” (a raiser of taxes) 라는 뜻이다. 그는 인두세를 거둘 목적으로 전국에 인구 조사에 해당하는 호적령을 내렸는데, 이 일 때문에 나 사렛에서 살던 요셉과 만삭이 된 마리아가 자신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갔다가 거기서 아기 예수를 출산함으로써(눅 2:1~7), 미가서에 예언된 구주의 출생지에 관한 예언(미 5:2)을 성취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를 이어서 로마 황제가 될 사람은 누구이며 그가 할 일이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가?
“또 그의 왕위를 이을 자는 한 비천한 사람이라 나라의 영광을 그에게 주지 아니할 것이나 그가 평안한 때를 타서 속임수로 그 나라를 얻을 것이며 22 넘치는 물 같은 군대 가 그에게 넘침으로 말미암아 패할 것이요 동맹한 왕도 그렇게 될 것이며”(단 11:21, 22).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사람은 티베리우스 카이 사르(Tiberius Caesar)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친아들이 아니라 그 와 재혼한 어머니 리비아(Livia)를 통하여 황실 가족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당신의 아들이 로마제국의 자주 옷을 입기에는 너무 비열하다” 는 말로 리비아의 청을 거절했으나, 예언된 대로, “평안한 때를 타서 궤휼로 나라를 얻”어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이다. 예언된 대로, 그는 독일을 비롯한 각처의 소요를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 압하여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 그런데 “동맹한 왕”도 그에 의해 같은 일을 당 할 것이라는 예언은 무슨 뜻인가? “동맹한 왕”의 바른 번역은 “언약의 왕”(The prince of covenant)인데 똑같은 용어가 쓰인 곳이 같은 다니엘서 9장 24~27절로서” “언약을 굳게 정할”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가리켰다.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로마의 황제가 누구일지를 그 일이 있기 500여 년 전에 다니엘서 11장 의 계시를 통해 예언된 것이다.
다니엘서에 예언된 대로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역사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다니엘서 11장의 연구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예언된 많은 사건들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연이 아니라 범죄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빗나간 지구 역사의 본궤도 재진입을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역사의 필연임을 확신하게 된다. 11장의 연구 마지막에 제시된 「역사의 의미, 내용, 목적은 도대체 무 엇인가」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선과 악의 싸움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의 다니엘서 11장의 연구를 통하여 페르시아 시대로부터 헬라, 헬라 남북왕조 시대, 그리고 로마 시대에 접어들었다. 11장 22절에 이르러, 다니엘서 9장의 70주일에 관한 예언에 따라,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피로써 비준하기 위해(마 26:28)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언약의 왕”의 직분을 약속대로 수행하셨음을 확인했다. 이제 그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우리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세상 역사에 관한 예언이 사중의 구조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세상 역사에 관한 예언이와 같이 사중의 구조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제부터의 성서 예언이 너무나 상세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나무 하나 하나를 관찰하다가 숲을 보지 못하여 숲 속에서 길을 잃은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언 해석의 안전을 보증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다니엘서의 예언이 지닌 독특한 사중 구조를 활용하는 길 이다. 즉 세상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관한 2장의 단순한 예언이 7장 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고, 8장에서 더 구체적인 초점에 맞춰 전개되고, 11장, 12 장에서 가장 서술적인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어, 서로 서로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전체의 개요에 어긋나지 않는 해석을 보증받게 된다.
11장 해석에 연관되어 제시된 「다니엘서 예언의 사중 평행구조」를 통해 어떠한 점들이 확인되었는가?
제시된 다니엘서 예언의 정확한 사중 평행구조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시도한 예언 해석을 점검해 볼 때, 하나도 서로 어긋남이나 무리함이 없이 바르게 진행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특별히 11장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22절까지의 내용과 31절부터 마지막까지의 내용은 뚜렷한 평행구조가 있어 상호 비교함으로 확실한 해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23~30절 사이의 내용은 평행구조에 자세히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새로운 내용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예언 해석에 있어서 신축성을 갖게 되는 부분이다. 확인된 또 하나의 사실을 11장의 내용과 가장 구체적인 평행을 이룬 내용이 8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장의 내용도 7장의 예언을 확대 해석한 것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로써 예언에 나타난 역할을 끝낸 로마제국의 뒤를 이어 그와 유사한 일을 계속할 세력은 무엇인가?
“그와 약조한 후에 그는 거짓을 행하여 올라올 것이요 소수의 백성을 가지고 세력을 얻을 것이며”(단 11:23).
평행구조에 의하면, 7장의 넷째 짐승인 로마제국 다음에는 작은 뿔인 중세 교황권이 일어난다. 8장에서도 처음에는 작게 올라온 수평적인 뿔인 로마 제국을 이어서 “군대의 주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수직적 활동 을 시작한 세력도 역시 작은 뿔인 중세 교황권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2장에서도 열 뿔 가진 무서운 짐승인 로마제국이, 여자가 낳은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후에 바로 등장한 세력은 중세기 1,26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여자)을 무섭게 핍박한 중세 교황권이었다(계 12:2~6). 그러므로 11장에서도 “언약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이어서 등장하는 새로운 세력은 역시 중 세 교황권이어야 평행을 이루는 합당한 해석이 된다.
헬라 시대 동안 치열하게 계속되어 온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싸움이 어떠한 새로운 체제로 재연되는가?
“그가 평안한 때에 그 지방의 가장 기름진 곳에 들어와서 그의 조상들과 조상들의 조상이 행하지 못하던 것을 행할 것이요 그는 노략하고 탈취한 재물을 무리에게 흩어 주며 계략을 세워 얼마 동안 산성들을 칠 것인데 때가 이르기까지 그리하리라”(단 11:24).
북방 왕이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짓밟고 하 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무섭게 핍박하다가 기원전 64년에 망한 뒤에 들어선 또 다 른 북방 왕은 로마제국이었으며, 로마제국도 시리아처럼 예루살렘 성전을 유린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무섭게 핍박했다. 그리고 서기 476년에 로마가 게르만민족에 의해 멸망을 당한 후에 그 뒤를 이 어 북방 왕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중세 교황권이었으며, 과거의 북방 왕이었던 시리아나 로마제국처럼 하늘의 성소를 훼방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을 계속함으로써 북방 왕의 역할을 계속했다(단 7:25, 8:11, 12; 계 12:6, 13:6, 7). 한편 남방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는 기원전 30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당 한 뒤 그 지배를 받다가 서로마가 망한 뒤에는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인 사라센의 지배에 들어갔다.
로마제국을 이어 새로운 북방 왕이 된 중세 교황권은 남방의 이집트 세력 을 어떻게 정복하려 했는가?
“그가 그의 힘을 떨치며 용기를 다하여 큰 군대를 거느리고 남방 왕을 칠 것이요.남방 왕도 심히 크고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맞아 싸울 것이나 능히 당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계략을 세워 그를 침이니라”(단 11:25).
중세 교황권은 성지인 예루살렘 순례를 구원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그런데 사라센에 이어 또 다른 이슬람 세력인 투르크가 예루살렘을 지배하면서부터 예루살렘 순례를 훼방하고 순례자들을 핍박하자 교황은 전 유럽을 총동 원하여 150년 가까이 계속된 십자군전쟁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탈환하 려 했다.
그런데 당시의 예루살렘은 이집트에 근거를 둔 이슬람 지배 세력인 칼리프 [마호멧의 후계자]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실제로는 북방 왕이 된 로마교황이 이집트에 근거한 또 다른 남방 왕을 공격한 것이다. 이렇게 일어난 제1차 십자군 (AD 1096~1099년)은 예언된 대로 “힘을 떨치고 용맹을 발하여 ‘남방 왕’의 세력을 공격하여 1099년 6월 15일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거기에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한 후 개선하였다. 그때 소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표방한 십자군이 학살한 이슬람교도의 피가 ‘행인의 발목까지 적실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W. R.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Middle Ages, 172).
그럴 듯한 명분을 앞세워 일으킨 비인도적인 십자군전쟁에 얽힌 이해관계에 대해 어떠한 구체적인 예언이 있는가?
“그의 음식을 먹는 자들이 그를 멸하리니 그의 군대가 흩어질 것이요 많은 사람이 엎드러져 죽으리라 27이 두 왕이 마음에 서로 해하고자 하여 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니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임이라”(단 11:26, 27).
동기부터가 미신적이었던 십자군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신과 부패의 본질을 드러냈다. 참가한 왕들이나 나라의 이해관계가 저마다 달랐으며, 다수의 십자군은 약탈자와 장사꾼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두 왕이 한 밥상에 앉았을 때 거짓말을 할 것”이라는 예언처럼, 십자군의 지도자들인 그리스도인 왕들과 이슬람 지도자인 칼리프나 술탄 사이의 믿을 수 없는 약속과 조약들이 비참한 십자군전쟁의 역사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슬람의 술탄 살라딘(Saladin)과 엄숙한 평화 협약을 체결해 놓고도 배신한 지도자 레지날드(Reginald)와 기드뤼지농(Guy de Lysignon)의 경우이다(Prerite-Orton, Medieval History, 529~531).
실패로 끝난 십자군의 종말에 대하여 어떠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가?
“북방 왕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리니 그는 마음으로 언약을 거스르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본토로 돌아갈 것이며 29작정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 30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면서 맺은 언약에 분노하였고 자기 땅에 돌아가서는 맺은 언약을 배반하는 자들을 살필 것이며”(단 11:28~30).
10여 세의 소년들을 불러 모아 소년 십자군까지 일으키는 등 온갖 수단 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예루살렘 정복을 시도한 7차에 걸친 십자군전쟁은 때때로 승리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중세 교황권은 약화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세 로마 교황권이 십자군을 통해 시도했던 성지 탈환은 실패했지만, 의외로 동방의 문물이 서방에 전달되는 계기가 됨으로써, 직후에 유럽에서 문예부흥으로 일컫는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을 위해 양측이 모두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들로부터 배를 빌려 쓰게 되어 “서방의 배”가 싸움에 동원되리라는 예언도 이루어졌다.
예언된 대로, 마지막 인 제7차 십자군은 모슬렘[이슬람]의 본거지인 남방 왕 이집트를 직접 침공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마지막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이집트 군에 포로가 되었으며, 몸값을 내고 겨우 살아 돌아갔다. 예언 된 대로, 십자군전쟁의 결과 북방 왕인 로마 교황권은 “ 낙심하고 돌아가”(11:30) 는 루이 9세의 모습처럼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고, 잇달아 일어난 16세기 종 교개혁으로 깊은 곤경에 빠지게 된다.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기는 일에 박차를 가하는 역사를 이어지는 연구에서 확인하게 된다.
북방 왕의 자리에 들어선 중세 로마 교황권은 어떠한 역할을 통해 하나님의 성소와 백성을 훼방하게 되는가?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32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 라”(단 11:31, 32).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없애 버 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12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매일 드리는 제사가 넘긴 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단 8:11, 12).
시리아와 로마제국에 이어 새로운 북방 왕이 된 중세 교황권에 의해 하 나님의 성소와 백성에게 어떤 일을 일으키게 될지를 예언하고 있다. 11장 31절 과 평행구조를 이루는 8장 11절을 비교해 볼 때 이곳의 성소는 수직적인 작은 뿔이 공격하는 하늘 성소이며, “매일 드리는 제사[타미드]”로 표현된 하늘 성소의 끊임없는 봉사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수행하시는 봉사(히 4:14~16)인 것이다. 8장 연구에서 밝힌 대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하여 아직도 이 땅에서 행해지는 사제(제사장)제도, 고해성사, 제사인 미사(Mass) 성제, 화체설, 마리아 중보 등은 모두 하늘에서 수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성소 봉사를 “훼방”하고 “폐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북방 왕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시련을 겪으며 어떠한 반응을 하게 되는가?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 33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들이 많은 사 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몰락하리라”(단 11:32, 33).
이 일은 다니엘서 7장(25절)에 나타난 작은 뿔에 의해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성도들이 겪게 되는 핍박이나, 12장(7절)에 다시 언급된 중세기(AD 538~1798년) 동안의 성도가 겪을 경험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12세기 초 북이탈리아에서 왈덴스인들이 일어나 죽음을 무릅쓰고 지방 어로 번역된 성경을 배포하고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비성서적인 교리를 전면 거부하고 진리를 가르치다가 십자군에 의해 무참한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예언 대로 “하나님을 아는 용맹한 백성”들이 일어난 것이다.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 지혜로운 자들로 14세기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출신 위클립 교수를 비롯하여 철두철미한 개혁을 주장하고 가르치다가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진 보헤미야[체코]의 프라하 대학총장 허스(Huss), 교수 제롬 (Jerome), 이탈리아 수도승 사보나롤라(Savonarola), 영국의 틴데일(Tyndale) 등 무수한 사람들을 꼽을 수 있다. 중세기의 암흑이 한참 깊어 가던 16세기 초 독일의 루터(Luther), 스위스의 츠빙글리(Zwingli), 프랑스의 칼뱅(Calvin) 그 리고 홀란드의 메노 시몬(Menno Simmons) 등에 의해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나 예언대로, “몰락할 때 도움을 조금 얻”었다. 그러나 잇달아 일어난 로마 가톨릭의 강력한 반 종교개혁에 부딪혀 지리멸렬하여 결국 개혁 을 완수하지 못하고 교파만을 양산한 개신교로 정착되고 만다. 이러한 중세 교황권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일어나 죽음을 불사하고 불의에 항거했으며, “지혜로운 자들”이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다가 불과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생생한 예언이 성취됐다.
북방 왕인 중세 교황권의 활동이 제한을 당하는 “작정된 기한”은 언제인가?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하단).
다니엘서에 명확히 예언된 작은 뿔인 중세 교황권의 활동 기간은 “한 때, 두 때, 반 때”, 곧 1,260일(년)로 확정되어 있다(단 7:25, 8:19, 11:35). 그것은 6세기(AD 538년)에 시작되어 프랑스혁명이 끝나는 18세기 말(AD 1798년)까지 한정되어 있다. 결국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부패한 왕권과 타락한 교권이 무너지면서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사가 시작된 것이다.
마지막 북방 왕의 신성모독에 관한 어떤 속성들이 낱낱이 예언되어 있는가?
“그 왕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분노하심이 그칠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작정된 일 을 반드시 이룰 것임이라”(단 11:36).
“그 왕”이 누구인가에 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어 왔다. 하나는 35절에 언급된 “마지막 때”를 시작한 무신론적인 프랑스혁명 세력이라는 전제로 해석을 펼쳐 간다. 그럴 경우에는 40절의 “마지막 때” 에 남방 왕 이집트에게 찔림을 받는 북방 왕을 당시의 역사 상황에 적용하여 터키로 돌리게 된다. 그리하여 터키가 이집트와 싸우게 되고 이에 연루되어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가 참여한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에 맞추어 해석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 정세를 따르기보다는 본래 견지해 왔던 일관성 있는 해석에 따라,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 정관사까지 붙여진 36절의 “이 왕”을 새로운 프랑스혁명 세력이 아니라 앞서 소개된 중세 교황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보다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북방 왕인 로마교황권의 역할과 성소 훼방, 성도 핍박, 진리 유린 등 일반적인 속성들은 이미 앞서의 31~35절에서 언급하였다. 이에 부가하여, 11 장 36절~39절에 기록된 마지막 북방 왕의 또 다른 속성들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일과 신성모독이었다. 하는 일을 볼 때, 그것이 다니엘서 7장과 8장에 이미 소개된 마지막 북방 왕이요, 작은 뿔인 로마교황권임에 틀림없다. 다음의 몇 특 성을 대조해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북방 왕의 구체적인 또 다른 속성들은 무엇인가?
“그가 모든 것보다 스스로 크다 하고 그의 조상들의 신들과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38그 대신 에 강한 신을 공경할 것이요 또 그의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신에게 금 은 보석과 보물을 드려 공경할 것이며” (단 11:37, 38).
“열조의 신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표현이나, “아무 신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극도의 불경을 드러내는 말로, 자신을 하나님의 지상의 대리자로 자처한 전통적인 교황권에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여자의 사모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자의 최고의 관심은 자녀와 남편에게 있다. 여자가 자녀와 남편을 누리게 하는 제도가 혼인이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라고 권면되었으며(히 13:4), “혼인을 금하”는 일을 합당치 않은 신앙의 속성으로 돌렸다(딤전 4:3). 독신 제도를 교리로 택하여 결혼을 억압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요 생리의 법칙 에도 적합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대신 “강한 신”을 공경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는 배도한 교회를 음녀로 표현했는데, 그 음녀는 나라를 상징 하는 짐승을 타고 있다(계 17:3).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하면 하나님 대신 세속적인 권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것이 중세 교회가 보여준 정교일치의 신조였으며 그 결과는 모두의 타락과 부패와 파멸이었다. 예배와 신앙 행사에 금, 은, 보석과 보물을 바친다는 말은, 타락한 교회를 묘사한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진 요한계시록의 음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계 17:4).
다니엘서에 자주 나오는 “마지막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마지막 때에 남방 왕이 그와 힘을 겨룰 것이나 북방 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 로 회오리바람처럼 그에게로 마주 와서 그 여러 나라에 침공하여 물이 넘침 같이 지 나갈 것이요”(단 11:40).
“마지막 때”(the time of the end)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드 케츠”인데 성경 전체에서 5번 나오는 특별한 용어로 아래와 같이 모두 8장 이후의 다니엘서 에만 나타난다.
그런데 이 구절들을 평행구조와 문맥을 통하여 볼 때, 이 “마지막 때”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 중세 교황권의 전성시대가 끝나는 “한 때, 두 때, 반 때”의 끝인 1798 년이다. 1798년 중세기의 상징인 교황 피우스 6세(Pius Ⅵ)가 프랑스 군사 정부의 베르띠에(Berthier) 장군에게 잡혀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옥사함으로써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사가 시작된다.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는 세상 역사의 근세사의 시작인 것이다.
본래 남방과 북방의 개념은 이스라엘을 방위의 기준으로 한 표현이다. 다니엘서 11장에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가 이스라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북방 왕(king of north)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는 이스라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방 왕(king of south)으로 부른 것이다. 남방 왕과 북방 왕은 지정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각각 남쪽과 북쪽에서 이스라엘을 압 박하고 고통을 주고, 때로 파멸을 가져온 적대 세력을 의미했다. 최초의 북방 왕은 바빌로니아이었으며(렘 1:15), 헬라의 남북왕조 시대에는 시리아가 북쪽에서 유다를 괴롭혔고 이집트는 남쪽에서 괴롭혔다.
이러한 배경에서 다니엘서 11장 15절 이전까지의 남방 왕은 이집트였고 북방 왕은 시리아였지만, 그 후 시리아는 기원전 64년에, 이집트는 기원전 30년에 모두 로마에게 망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유다)도 기원전 63년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나라마저 없어졌으며, 실제로 신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참 교회를 영적인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다(롬 9:27; 갈 3:28, 29).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참 백성인 것처럼, 마지막 때의 남방 왕과 북방 왕도 모두 영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참 교회를 괴 롭히는 적대 세력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빌로니 아가 문자적인 바빌로니아가 아니라 영적인 바빌로니아인 것과 같은 경 우이다.
따라서 마지막 때의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싸움은, 이미 확인된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인 “프랑스혁명 이후(AD 1798년 이후) 하나님의 참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등장하는 두 세력의 싸움”으로 보아야 합당하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의 북방 왕 은 누구이며 남방 왕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다니엘서 연구를 통해 살펴본 북방 왕의 계보는 바빌로니아 → 남북왕조의 시리아 → 로마 → 로마 교황권으로 빈틈없이 이어져 왔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의 남방 왕은 누구인가?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살펴 본 남방 왕의 계보는, 고대 이집트 → 헬라 남북왕조의 이집트 → 이집트에 본거지를 두었던 반 기독교적인 사라센(이슬람) 세력(단 11:25)으로 정리되는데 이것은 중세기 십자군전쟁 시대의 배경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인 “한 때, 두 때, 반때”, 즉 1,260년 기간이 끝나는 때의 “남방 왕”은 누구인가? 그 대답이 바로 요한 계시록 11장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계 11:1~3).
누가 읽어보아도 그 뜻이 분명한 내용이다. 즉 중세 교황권이 하나님의 교회와 참 백성을 짓밟고 있던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인 1,260년 동안,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로 표상된(계 11:6) 신, 구약 성경이 수난을 받아 상복을 입고 예언하는 생생한 모습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기간이 마쳐가는 때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리라는 예언이 주어졌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계 11:7, 8).
사탄의 세력이 지배하는 근원으로 알려진 무저갱(밑바닥 없는 수직굴)으로부터 나라나 어떤 세력을 상징하는 한 짐승이 출현하게 되는데 그 짐승이 상징한 나라가 중세기 동안 작은 뿔인 교황권에 의하여 읽지도, 번역하지도, 소유하거나 가르쳐서도 안 되는 금서로 수난을 겪은 두 증인인 신, 구약 성경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암흑의 중세기를 끝나게 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혁명이다. 프랑스혁명정부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교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그토록 적대적이었는가?
전적으로 그렇다. 왜 냐하면, 프랑스혁명은 부패한 구체제의 왕권과 타락할 대로 타락한 교권에 대한 민중의 항거였기 때문이다. 혁명 즉시 국왕 루이 16세 부처를 단두대에 처형했으며 수많은 성직자들을 죽이거나 추방했고 당시의 80세 고령의 교황 피우스 6세(Pius Ⅵ)도 발렌스 감옥에서 옥사시킨 것이다. 1793년 혁명의회에서는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폐지하고 성경을 금지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기나긴 중세기 동안 중세 교황권이 뿌린 씨앗을 열매로 거둔 것이다. 중세 교황권이 잘못 드러 낸 하나님과 교회와 성경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너무 컸으므로 볼테어(Voltaire) 와 루소(Rousseau), 페인(Paine) 등에 의하여 대담한 무신론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성경은 그것을 세계 사의 일대 지진이라고 예언했다(계 11:13).
“프랑스혁명은 공산주의라고 하는 또 하나의 현존하는 유산을 남겼다. 마르크스(Marx)는 공산 주의를 규명하기 위해, 레닌(Lenin)과 트로츠키 (Trotsky)는 1917년 볼쉐비키혁명을 준비하면서 프랑 스혁명의 전 과정을 세밀히 분석했다”(C. M. Maxwell, God Cares, Vol. 2, 284). “프랑스혁명이 앞서 발생하지 않았던들 공산주의 운동이 현재와 같은 양상을 결코 띠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R. R. Palmer, The Age of Democratic Revolution, vol. 1, 11, 12). “마르크시스트 역사가들은 1789년 프랑스의 부르주아혁명이 19세기 유럽에서의 연속적인 혁명적 요소를 불러일으켰다고 정리하고 있다.
부르주아혁명은 1848 년 3월 프랑스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일어나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했다”(“프랑스혁명 200주년”, 주간 한국, 1987. 7. 22.). “그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여 그 시체가 거리에 놓여 있는 그 큰 성은 영적으로 애굽(이집트)이었다. 성경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나라 가운데서 애굽처럼 대담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고 그분의 명령을 거역한 나라는 없었다(출5:2). 그것은 무신론이었다”(엘렌 G 화잇, 각 시대의 대쟁투 하, 446). 결과적으로 다니엘서 11장의 “마지막 때”를 시작한 사건은 프랑스혁명이며 그것은 영적인 남방 왕 애 굽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성경은(계 11:8) 못박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적인 기초는 공산주의를 탄생시킨 무신론이다.
영적인 북방 왕인 중세 교황권과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영적인 애굽이요 남방 왕인 프랑스혁명 이념 세력인 무신론의 대결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마지막 때에 남방 왕이 그와 힘을 겨룰 것이나 북방 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오리바람처럼 그에게로 마주 와서 그 여러 나라에 침공하여 물이 넘침 같이 지나갈 것이요”(단 11:40).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다르고” (계 13:2, 3).
남방 왕이요 영적 애굽인 무신론적 프랑스혁명 세력에 의해 깊은 상처를 받은 북방 왕 교황권은 신속히 회복되어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을 뿐더러 일대 반격을 가하여 회리바람이나 홍수같이 세상을 압도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것 이라고 예언되었다. 과연 프랑스혁명의 결과로 세속권과 종교적 위엄과 영토까지 모두 상실한 로마 교황권은 재기에 전력을 다했다. 많은 부작용 때문에 한 때 폐지했던 예수회를 부활시키고, 1929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정권과 라테란조약을 체결하여 잃었던 교황령 바티칸을 다시 찾고, 1961년 개신교 종주국인 미국에서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 케네디를 당선시키면서 급속히 기반을 굳히고 넓혔다. 그리하여 지금은 예언된 대로, “온 땅이 이상히 여겨” 따르는 세계적인 지도력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41절의 “영화로운 땅”도 이 제는 실제의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영적인 “영화로운 땅”으로서, 영적인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참 백성의 영역까지 주관할 만큼 막강해짐을 뜻한다.
심지어 누구까지도 북방 왕의 세력에 압도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는가?
“그가 여러 나라들에 그의 손을 펴리니 애굽 땅도 면하지 못할 것이니 43그가 권세 로 애굽의 금은과 모든 보물을 차지할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단 11:42, 43).
무신론적인 프랑스혁명에 의해 받은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현대 북방 왕인 교황권은 “열국에 그 손을 펴” 온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언되었는데 제삼세계를 대표하는 아프리카의 리비아와 구스[에티오피아] 까지도 그의 세력에 복종할 것이며, 마침내는 지난날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무신론 국가들도 포함될 것이며, 그 가운데는 소련도 예외가 아니라는 놀라운 예언이다.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발생한 무신론적인 공산혁명이 러시아(1917), 북한(1945), 중국(1949), 쿠바, 에티오피아, 중남미 등 전 세계로 번지면서 가장 위협을 느낀 것은 교황권과 미국이었다.
그동안 종교적 이념과 과거사 때문에 외교 관계도 맺을 수 없을 만큼 공존이 불가능했던 미국과 교황권은 공동의 적인 무신론적 공산주의를 대항하기 위해 1984년 최초로 대사를 교환하는 외교 관계 를 수립하였다.그리고 비밀리에 레이건 대통령과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의 노조운동을 계기로 동구와 소련에서의 공산 세력을 붕괴시키기로 협약하고(1982. 6. 7.) 그 계획을 착실히 수행해 나간 끝에 동독을 비롯한 동구의 공산권이 무너졌으며, 마침내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졸지에 붕괴되기에 이르렀다(1991.12.). 공산주의 초강대국인 소련이 지도에서 사라진 것이다.
현대의 교황권은 어떠한 방법으로 세계의 지도력을 확보하고자 하는가?
“그가 권세로 애굽의 금은과 모든 보물을 차지할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 17:2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 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계 17:2).
“애굽의 금은과 모든 보물을 잡을 것”이라는 예언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 전략을 뜻하기 때문이다. 영적 이집트인 무신론적인 공산권의 붕괴는 경제의 몰락 때문이었다. 계시록 13장에 기록된 대로, 거짓 예배를 강요하는 수단도 역시 짐승의 표로 표현되는 “매매를 못하게 하”(계 13:17)는 경제 통제인 것이다.
또한 세속적인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땅의 임금[정치적 지도자]들”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유지하며 새로운 세계 질서를 주창하고 포도주로 취하게 하듯 자신의 신조와 통치 이념을 고취시킬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모두 현실이 된 놀라운 예언이다.
마지막 북방 왕인 교황권이 세계의 지도력을 거의 장악할 무렵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그러나 동북에서부터 소문이 이르러 그를 번민하게 하므로 그가 분노하여 나가서 많은 무리를 다 죽이며 멸망시키고자 할 것이요”(단 11:44).
이처럼 세상의 대권을 장악했다고 생각하게 될 때 영적인 북방 왕을 번뇌케 할 뿐만 아니라 분노하여 살육까지 감행하게 할 놀라운 소문이 동북에서부터 오게 된다는 예언이다. 이곳의 “소문”은 “소식”, “기별” (tidings)로 번역되는 말이다.
북방 왕을 분노하게 할 “동북에서부 터 오는 소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 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1~3).
본래 해 뜨는 동쪽은 하나님의 사자가 오는 곳으로(계 7:2, 사 41:25), 예 수님이 나타나는 곳의 상징이다(겔 43:1, 2; 시 48:2). 북쪽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는 곳(사 14:13)이다. 이 모든 것을 조 합해 볼 때 “동북에서부터 소문”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게 확실하다. 또한 세 천사의 기별(계 14:6~12)로 적용할 수도 있다. 이 기별이 늦은비 성령의 능력 으로 힘있게 전해질 때에 온 세상이 그 영광으로 환하여지게 될 것이다. 왜 이 기별에 대하여 북방 왕이 그렇게 분노할까? 그 기별의 내용이 바로 본래의 북방 왕의 표본인 영적 바빌로니아의 죄상을 공개하고 교황권의 파멸을 알리는 심판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계 13:13~15).
북방 왕의 마지막 시도와 운명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울 것이나 그의 종말이 이 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단 11:45).
역대 북방 왕들의 시도는 하나님의 성소를 훼파하는 일과 하나님의 백 을 박해하는 일이었다. 마지막 북방 왕인 교황권의 과거도 그랬고 앞으로도 동일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남은 백성을 대적할 때 용은 “바다 모 래 위에”섰다(계 12:17). 다니엘서 11장 45절의 “영화롭고 거룩한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이다(시 48:1, 2). 시온산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서기 70년 하나님의 성전과 백성이 있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우상의 군기를 펄럭이며 포진하는 광경을 상상하시며, 예수께서는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그 때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마 24:15)고 권면하셨다. 그 때 예루살렘은 시리아를 이어 북방 왕이 된 로마에 의해 함락되었지만, 마지막 싸움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으로 마지막 북방 왕인 교황권의 세력이 붕괴될 것이다.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줄 자가 없” (45절) 을 것이기 때문이다(계 17:16).
참으로 길고도 험난한 역사의 여정이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조류 속에서 온갖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며 예정된 역사의 목적을 차질 없이 수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 위에 엄연히 존재해 왔음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그 것은 계획하신 것을 끝까지 성취시키시는, 역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통치 의지의 빈틈없는 표현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구속사관이다. 다니엘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세상 역사 속의 하나님의 백성의 여정을 우리는 낱낱이 살펴보았다. 그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기록처럼 막연하거나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가장 구체적 방법으로, 가장 역사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그리고 다니엘서의 네 번째이며 마지막 예언이 취급한 범위가 너무나 넓고 깊고 분명 했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해 있는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확실한 미래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시다.
문제는 나와 역사이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구속사관을 이해하고 이를 위해 살면 우리는 누구나 역사의 주역이 되어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한낱 역사의 조역이 되어, 역사의 장면이 바뀌면 퇴장하여 한줌의 흙이 되고 마는 덧없는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 이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영원한 생사의 갈림길이다. 지금이 바로 그 생명의 길을 선택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영원한 보상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인 12장은 11장의 연속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다니엘서 전체의 결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니엘서의 서론인 1장이 시작될 때 지리적으로 북방 왕이었던 바빌로니아가 영화로운 땅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는 비극적인 역사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또다시 최후의 영적 북방 왕이 영화로운 산인 하나님의 마지막 교회와 백성을 공격해오는 모습을 예언으로 조명했다. 그러나 이번의 결과는 전과 판연하게 다르다. 그때의 육신적인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과 불성실로 바빌로니아에 짓밟히고 끌려갔지만, 지금 지구 역사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계 12:17)이 있어서 사자굴 속의 다니엘처럼, 풀무불 속의 세 친구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지구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철두철미하신 계획을 끝내 이룰 것이다. 그들이 바로 역사의 주역이요, 마침내 이 땅의 영원한 주인이 될 것이다.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인 12장은 어떠한 극적인 주제로 시작되는가?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단 12:1).
“그 때에”는 11:45의 사건이 일어나는 종말의 때, 즉 북방 왕이 끝에 이 르지만 그를 도와 줄 자가 아무도 없을 그때를 가리킨다. 교황권의 세력이 사라 질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 그 재림을 두고 “네 민족을 호위하는 군주 (대군) 미가엘(Michael)이 일어날 것이요”라 하였다. 미가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라는 뜻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이다.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 장의 봉사를 마치실 때에 왕의 의관을 갖추시고 성소에서 나와 재림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미가엘이 언제 일어나는가? 재림 전 심판이 끝날 때에, 은혜의 시기가 마칠 때에,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고 선포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시어 아버지께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으시고(7:13, 14), 그 나라를 성도들에게 주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 그런데 재림 직전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그의 사업을 마치고 일어나서 복수의 옷을 입으시고 나오실 때에 비로소 마지막 일곱 재앙이 부어질 것이다. 바로 그때 야곱의 환난이 시작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고 하였다. 이것은 창세기 31:43~32:32의 야곱의 경험을 표상하여 일컫는 환난이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매어달릴 수밖에 없었던 진퇴유곡에 처했던 경험이었다. 이 같은 경험을 예레미야는 야곱의 환난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0:5~9).
그때에 “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책은 무슨 책인가. 바로 7장 9~13절에서 이미 그 장면이 소개된 재림 전에 있을 조사심판의 때에펼쳐지는 책, 곧 생명책이다. 그것은 성도를 옹호하기 위해 베푸시는 심판이다. 그렇다면 언제 그 심판이 시작되는가? 그것이 우리가 8장에서 연구한 “2,300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해지리라”(8:14)는 말씀의 뜻이다. 그것은 1844년 부터 하늘성소의 둘째 칸인 지성소에서 시작된 대속죄일의 마지막 장면인 것이다.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때에 어떤 특별한 일이 있게 되는가?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가로 부여되는 영생은 예수께서 재림 하실 때 부활을 통하여 비로소 누리게 된다. 사람이 죽는 즉시 몸을 떠난 영혼이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가르침은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거짓이다. 그것은 사탄의 처음 거짓말인 영혼불멸설에 기초한 것이다(창 3:3, 4).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요 (요 5:28, 29, 11:24), 사도들의 가르침이며 (살전 4:13~18; 고전 15:35~44, 51~54), 지금 다니엘이 가르치고 있는 진실이다. 부활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속죄함을 받은 의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참여하는 “첫째 부활”이 있다(계 20:5, 6; 살전 4:13~18).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아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 재림이 있 은 지 천년 후에 불로 소멸되는 심판을 받기 위하여 참여하게 되는 “둘째 부활” 이 있다(계 20:5, 6; 요 5:28, 29). 그래서 첫째 부활을 “생명의 부활”, 둘째 부활 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른다(요 5:28, 29). 그런데 다니엘서 12장 2절에는 재림의 때에 영생을 얻기 위하여 부활하는 의인들과 함께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포함되어 있어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예외 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미 사례를 설정해 놓으셨다. 그분께서 자신을 재판한 파렴치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참람된 언사와 처사를 듣고 보신 뒤,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하셨다. 둘째 부활에 참여하여야 할 죄인이 어떻게 살아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목도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의 부활은 우선 목적부터 다르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토록 조롱하고 모독한 그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똑똑히 알 수 있는 참관의 기회를 갖게 될 뿐이다. 이러한류의 사람들을 위한 부활을 특별부활 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역사가 종결되는 이 심각한 시간에 가장 큰 명예와 영원한 영광을 누릴 사람들은 누구인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다니엘은 지식뿐 아니라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혜 있는 자”의 본뜻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 혹은 “분별력을 가지게 하는 사람”이다. 지혜는 지식을 바르게 활용할 줄 아는 정신적 기능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별처럼 빛났던 다니엘의 일생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잠 9:10)임을 자신의 생애로 실증한 것이다.
사람은 모두 세상의 칭송과 인기를 독차지하는 “스타(star)”가 되고 싶어 한다. 스타가 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가. 그러나 세상의 명예나 영광은 너무나 무상하여 오늘의 스타가 내일에는 별똥이 되고 만다. 그러나 여기 영원한 스타가 되는 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죄 때문에 길을 잃고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구주 예수께로 인도하는 일이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인간을 인도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일은 그 자체가 스타의 생애인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생애는 그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다니엘이나 세 친구와 같은 청소년을 교육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표본이다.
마지막 계시를 마치며 다니엘은 자신이 받은 계시에 대해 어떠한 지시를 받는가?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다니엘은 자신이 받은 계시의 어떤 부분은 마지막 때가 될 때까지 인봉하여 두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가 받은 계시의 전체인가, 아니면 일부인가? 우리는 다니엘이 받은 계시 혹은 이상 가운데 두 종류가 있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하존(chazon)”이라고 하는 형식의 계시인데, 성령의 감동 을 받아 “뇌 속으로 이상을 받”(단 7:1)는 일반적인 계시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시 가운데 다시 그리스도나 천사 등 거룩한 존재가 직접 나타나 기별을 전하는 “계시 중의 계시”, “이상 속의 이상”이 있다. 일종의 극중의 극과 같은 것인데 이러한 계시를 히브리어로 “마레(mareh)라고 한다. 이때는 언제나 거룩한 존재가 나타나고, 강이나 바다 같은 배경이 마련된다.
다니엘서에 쓰인 첫 번째 “마레” 계시는 2,300주야 문제가 소개된 경우였다(단 8:15, 16). 그때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고 가브리엘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이상(마레)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단 8:16)는 명령이 내린다. 이것은 “정한 때 끝(에드 캐츠)”, 곧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였다. 다니엘이 끝까지 깨닫지 못한 계시는 바로 2,300주야에 관한 해석이었다. 9장의 계시를 통해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깨닫게 되었지만(단 9:25), 아직도 그 구체 적인 내용은 깨닫지 못한 채 마지막 계시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다음의 5~9절에서 계속 다루어진다. 곧 2,300주야에 관한 “마레” 계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또다시 마지막으로 어떠한 계시(마레)가 주어지는가?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6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7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단 12:5~7).
지난 8장에서 그리스도와 가브리엘 천사가 강을 배경으로 나타나 계시 한 2,300주야에 관한 해석이 다시 한 번 같은 배경의 계시를 통해 제시되었다. 세마포 옷을 입으신 분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아버 지께 양손을 들고 서약하신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 기사”(단 8:13), 곧 하나님의 성소와 백성의 운명에 관계된 2,300주야에 관한 기사의 끝이 어느 때 까지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은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가 지나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진 후에야 그 끝이 오게 된다는 대답이었다.
그것은 8 장 17, 26절에서 다루어진 2,300주야에 관한 질문의 반복이었다. 다니엘서 7장의 연구에서 이미 밝혀진 대로,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조사심판은 반드시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 중세 교황권의 활동 기간인 중세기 1,260년 기간의 끝인 1798년보다 나중에 오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심판은 언제나 “끝”에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히 9:28).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는 중세기 1,260년 기간이 끝나는 1798년 이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 그 계시의 내용을 깨닫지 못하자 다시 어떠한 지시가 내려졌는가?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 나이까하니 9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 할 것임이니라”(단 12:8, 9).
결국 8장에서 그 계시가 주어진 이래 완전히 깨닫지 못하여 계속하여 속 태우던 2,300주야의 끝에 관한 문제는, 그 계시를 받은 다니엘조차도 모두 깨닫지 못한 채 끝을 맺게 된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 라는 지시였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끝까지 깨닫지 못한 채 마지막 때인 1798년 이 후까지 보류해 두어야 할 계시는 다니엘서 전체가 아니라, 다니엘서 8장에서 주어진 2,300주야에 관한 “마레” 계시인 것이 자명해진다.
그렇다면, 왜 2,300주야 계시에 관한 분명한 이해를 마지막 때 이후로 미루었는가?
비록 그 직접적인 대답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이유는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이 구약시대의 최대의 관심이요 역사의 목표였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상 역사의 종결이요, 역사의 절정이기 때문에 그 의의와 심각성은 견줄 데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는(계 22:12) 선악간의 보상이 집행되는 때이다. 재림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마지막이다. 재림은 질병과 고통과 죄와 사망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해결책이시다(계 21:4~7). 그리고 초림의 목적과는 달리 재림은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히 9:28) 오기 때문에 속죄에 관한 문제는 재림 전에 모두 종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죄가 성소로부터 완전히 제거됨으로써 성소가 죄로부터 정결해 지는(단 8:14) 대속죄일 행사가 끝나기까지는 재림하실 수가 없으시다(레 16:29, 30). 2,300주야[년] 기간이 끝나는 1844년 이전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수가 없으신 것이다. 속죄의 봉사를 끝내기 전에는 재림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다니엘을 비롯한 예전의 성도들이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늘 깨어 기다리는 긴박한 심정으로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앙생활에 필요한 건전한 긴장(tension) 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이 죽을 날을 모르고 사는 것이 유익하듯이, 재림의 시기를 알지 못하고 믿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연약한 인간을 위하여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판이 곧 시작되는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봉되고 봉함했던 구원의 시간표를 공개하심으로 능히 그 지식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또 사실 그렇게 되었다. 요한계시록 10장에는 인봉된 다니엘서의 마지막 계시가 펼쳐지는 똑같은 배경과 장면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어떤 다른 일정도 유보된 것이 없음을 확신시키기 위해 또다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서약하는 극적인 장면이 나온다(계 10:1~7). 지금 우리가 이렇게 다니엘의 마지막 계시를 막힌 것 없이 연구할 수 있는 것도 다니엘서가 개봉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에 “마지막 때”를 식별할 수 있는 적어도 두 가지 특징이 제시되어 있다. 교통수단의 급진적인 발달과 지식의 급격한 증가이다. 예언을 통해 제시된 “마지막 때”인 1798년의 상황이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이 시기는 인류 역사상 “제2의 물결”로 알려진 산업혁명 시대로 온 유럽이 새로운 지식과 교통수단의 발명으로 들끓고 있었다. 우선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인한 교통수단 의 급진적인 발달을 예시해 본다.
뿐만 아니라, 중세 교황권의 몰락으로 신앙과 양심, 출판과 학문의 자유를 누리게 된 유럽은 새로운 지식 사회로 급변하고 있었다. 특별히 18세기 말에 걸치는 이 시기에 적어도 몇 개의 혁명이 겹쳐 일어나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대이다. 이처럼 이 시기는 격변의 때로 과학적 지식과 교통수단뿐만 아니라 성경에 관한 지식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1830년대에 미국의 침례교 신자 윌리엄 밀러(W. Miller)에 의해 초교파적인 재림운동이 일어났다.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를 종결지으며 어떠한 예언적 기간들이 강조되거나 부가되었는가?
지금까지 다니엘이 그토록 관심을 가져온 “마지막 때”와 “2,300주야” 문제, 그리고 이 기간과 연관되어 하나님의 성소와 백성이 겪게 될 온갖 경험에 관 한 마지막 계시를 마치면서 다시 한 번 “마지막 때”의 기준 연대인 “한 때, 두 때, 반 때”, 곧 1,260년 기간이 “반드시”라는 말로 재확인 되었다. 그리고 이에 연관하여 두 개의 보조적인 예언적 기간인 1,290일(년)과 1,335일(년)이 부가되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예언상의 1일에는, 1,260일의 경우처럼 실제의 1년을 가리키는 「연-일 원칙(year-day principle)」이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 그 연대를 하나씩 살펴보자.
“마지막 때”의 기준 연대인 “한 때, 두 때, 반 때” 곧 1,260년 기간의 의의와 특징은 무엇인가?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단 12:7).
성경 본문에 나타난 대로 이 기간의 특징은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 는 핍박 기간이다(단 7:25, 11:32~35, 12:7). 엘리야가 이세벨에 의하여 혹 독한 시련을 겪던 표상적인 “삼년 반”의 의미가 내포된 기간이다. 1,260년 기간(AD 538~1798)의 끝인 1798년은 “마지막 때”의 기준 연대로 요한계시록에도 그 기간이 5회나 나와 있어 기준 연대로서(계 11:2, 3, 12:6, 14, 13:5)의 의의를 드높이고 있다.
1,290년 예언 기간의 의의와 특징은 어디에 있는가?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일을 지낼 것이요”(단 12:11).
매일 드리는 제사 즉 타미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사역하시는 매일의 중보사역을 말한다. 그것을 폐하며라는 문구는 작은 뿔의 세력이 그리스 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행하시는 매일의 중보사역을 찬탈하는 것을 말한다. 미사와 고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빼앗김을 당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참회자의 죄를 사하는 사죄권을 행사한다.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늘 대제사장의 기능을 퇴색시킨 로마교황권의 거짓된 종교 제도가 세워지는 것을 가리킨다(9:27). 예를 들면 미사제도, 고해성사, 화체설, 마리아 숭배, 교황 무류설, 주일성수 등이다.
“마지막 때” 곧 “정한 때의 끝”은 여러번 반복 설명한 대로 1798년이다.
그리스도께서 다니엘에게 1,260년의 기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1,290일의 기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의 1,260년 기간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기간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1,290년은 1798년을 넘어서서는 안 되기 때문에 1,260일의 기산점인 AD 538년보다 30년 먼저 시작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1798년을 1,290년의 기산점으로 삼는 것은 무리가 아닌 것이다. AD 1798년으로부터 역산해 보면 1,290년 기간의 기산점은 AD 508년이 된다 (1,798-1,290=508). 그러므로 1,290년 기간은 AD 508년부터 1798년까지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서기 508년에 이에 해당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중세 유럽 역사에서의 508년은 의미심장한 해이다. 서기 476년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의 부족들 가운데 강력한 부족은 프랑크(Frank)였다. 이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Clovis)는 자신이 496년 게르만족의 다른 부족인 알라마니 (Alamani)와 생사를 건 싸움에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한 데 대한 감사로 그의 병사 3천여 명과 함께 집단으로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 일로 “로마교회의 맏딸” 혹은 “맏아들”로 취급받았다.
그가 최초로 기독교로 개심한 이방인 왕이 된 것이었다. 클로비스가 침례 받고 가톨릭교도가 된 것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로마가 클로비스를 통해 유럽의 중심에 위치했던 고울 지역을 통치하게 된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클로비스가 아리안주의자들을 몰아 낸 것이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환영할 만한 신학적 승리였다. 결국 그는 AD 508년 동로마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Anastasius I) 황제로부터 로마의 귀족과 집정관(consul)의 칭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클로비스가 고울의 통치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클로비스는 511년 11월 27일 죽어 사도들의 교회 안에 묻혔다. 프랑크의 클로비스가 획기적으로 로마교회로 전향한 것은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다른 모든 게르만민족은 로마교회가 적대시한 아리우스파의 신앙(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함)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요, 교황권 확립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프랑크는 로마교회에 대대로 충성을 다하였다. 프랑크의 피 핀은 롬바르드족에게서 빼앗은 중부 이탈리아의 라벤나 지방과 펜타폴리스의 영지를 754년 1월 6일에 헌납하여 교황령이 되게 함으로 교황권이 최초로 영토를 가진 교회국가가 되게 하였다. 이에 대한 감사로 교황 레오 3세는 AD 800년 크리스마스에 피핀의 아들 프랑크의 샤를르마뉴(Charlemagne, AD 768~814) 대제에게 관을 씌워줌으로 신성로마제국을 탄생시켰다. 이리하여 신성로마제국은 교황권의 보호자가 되었다
1,335일 기간의 시작과 끝은 무엇이며 어떤 의의가 있는가?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단 12:12).
이제 또 하나의 예언적 연대가 마지막으로 부가되었다. 1,335일(년)이다. 우선 이 기간의 기산점이 별도로 제시되지 않았지만 문맥으로 보아 직접적으로 앞 기간의 시작인,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 (12:11)부터임이 합당하다.
그리하여 [508+1,335]는 1843년에 이른다. 기원전 457년에 시작되는 2,300주 야 기간과 일치하는 연대이다. 실제로 2,300주야 계시가 주어진 8장에서 “이상에 나타난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라고 묻는 질문에 대해 “2,300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여지리라” (8:14)는 대답이 주어졌으니 2,300주야의 끝은 실제로 1844년이었다.
1844년과 1843년 사이의 1년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실제로 요한 계시록 14장 6, 7절에 기록된 첫째 천사의 기별, 곧 다니엘서 8장 14절의 2,300 주야 예언에 기초한 심판의 기별을 전하기 시작한 것은 1843년부터였다(엘렌 G 화잇, 초기문집, 232~237, Testimonies to Ministers, 112~118).
뿐만 아니라 에스라 7장 7절에 근거하여 기원전 457년에 시작된 2,300주야의 끝이 1844년 10월 22일이 된 것도 그해의 대속죄일인 유대 성력의 7월 10 일이 양력으로는 10월 22일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레 16:29, 30). 실제로 가을부터 가을까지를 한 해로 치는 달력을 사용한 유대 민력에 따르면, 다니엘서 8장 14절, 2,300년의 마지막 해는 1843년 가을부터 1844년 가을까지 포함하게 된다. 그러므로 1월부터 12월까지를 1년으로 하는 로마력으로 계산하는 지금의 연대와는 실제로 3개월 이상이 겹치게 되어, 1843년과 1844년의 차이는 심각히 고려할 사안이 아니다.
1,335년의 예언적 기간에 이르는 사람은 왜 복이 있다고 했는가?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 너는 가서 마지 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2,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이상의 두 성경 본문은 문맥과 구성 때문에 서로 일치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모두 2,300주야에 기초한 심판과 세상의 마지막을 설명하고 선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왜 이 기간에 이르는 사람은 복이 있는가. 그 대답은 다니엘의 고뇌에서 찾게 된다. 그 기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당해야 할 시련과 고통, 진리를 위해 치러야 하는 엄청난 대가인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몰락” (단 11:33)하게 될 쓰라린 역사가 모두 지나간 후이며, 마침내 아래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특권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단 7:22).
이 약속은 다니엘서 8장 14절에 기초한 세 천사의 기별(계 14:6~13), 곧 “영원한 복음”인 심판의 기별(계 14:6, 7)을 듣고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도 약속된 보증이다(계 14:13).
다니엘에게 어떠한 영원한 보상이 약속되었는가?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너는 가서 마 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2, 13).
다니엘은 자신이 받았으면서도 모두는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과 성 소에 관한 마지막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끝은 다니엘이 치른 염려와 불안, 그리고 고뇌처럼 그렇게 어둡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참으로 복되고 진정으로 기다려지는 모든 약속의 성취로 가득 차 있었다.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어디서 쉴 것인가? 흔히 말하는 대로 영혼이 천당에 가서인가? 아니다. 재림 시에 있게 될 의인의 첫째 부활 때까지 잠처럼 의식 없는상태로 쉬게 될 죽음의 휴식인 것이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2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 57:1, 2).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20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 지어다”(사 26:19, 20).
18살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와 가족의 곁을 떠나, 90여 평생을 만리타향 이국에서 살아간 나그네 다니엘, 민족의 소망과 인류의 구원이 약속되고 조상의 얼이 서린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황폐를 그렇게나 마음 아파하던 애국애족의 사나이, 위대한 기성세대 다니엘, 왕과 사자들 앞에서는 태연자약했지만, 동족의 운명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그처럼 애절하여 몸져눕기 까지 했던 인간 다니엘, 세계 대제국들의 흥망성쇠가 어지럽게 교차한 세계사의 십자로에서 나라들과 왕들의 운명을 좌우하던 늠름한 선지자-정치가 다니엘, 나는 새도 떨어뜨릴 대제국의 높은 재상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겸손했던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 다니엘, 포로의 몸으로 포로 된 땅에서 살아 온 90성상에 거센 폭풍과 시련이 하루도 쉴 새 없이 휘몰아쳤어도 꺾이지 않고 쓰러지지 않은 뿌리 깊은 거목, 지성과 영성의 거인 다니엘, 하늘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지녀 온 하늘의 총아, 하나님의 귀염둥이 다니엘, 파란만장했지만 참으로 자랑스러웠던 그 다니엘의 위대한 일생도 서서히 저물어 갔다. 그리고 격전의 연속이었던 구속사의 뜨거운 한낮 동안 땀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하늘의 아들에게, 부활의 새아침을 약속하며, 기나긴 환난과 죄악의 겨울 밤 동안의 휴식을 가져올 깊고 오랜 단잠을 부르는 자애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평화로운 자장가가 아련히 들려온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 임이라”(단 12:13).
다니엘의 하나님이 곧 지금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다니엘에게 인봉된 채 주어 졌던 비밀이 지금 펼쳐져 우리의 손 안에 있다. 다니엘을 지키고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도 지키고 인도하실 것이다. 다니엘에게 말씀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고 축복하고 계신다. 다니엘에게 영원한 하늘과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기별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하늘과 영생을 약속하신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도 다니엘처럼 사는 일이다. 다니엘의 하나님이 이 일에도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 모두로 다니엘처럼 살게 하시기를 기도드리는 바이다. 아멘.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영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F. 윈슬로(Winslow) 박사에게 나폴레옹 3세의 소개장을 지닌 프랑스의 귀족 청년이 찾아왔다. “박사님, 잠 좀 자게 해주십시오. 여러 주일 잠을 전혀 자지 못하여 미칠 것만 같습니다.” 윈슬로 박사는 동정 어린 눈길로 청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청년은 최근 사업의 실패나, 명예 훼손, 가정 문제 등 어떤 문제로 크게 충격이라도 받은 일이 있소?” 젊은이는 모두 부인했다. “당신이 진실을 말해 주지 않으면 나도 아무 도움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말씀하세요.”
청년은 괴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무신론자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잠자리에만 들면, 이런 심각한 질문이 압도해 옵니다. ‘영원, 나는 그 시간을 어디서 보내야 할 것인가?(Eternity, where shall I spend it?)’ 이 질문만 떠오르면 잠은 멀리 멀리가 버리고 골이 터지도록 번민에 압도됩니다.”
앞으로도 시간은 영원히 흐를 것이다. 50년 후, 100년 후, 1,000년 후, 그때 나는 어디 있을 것인가? 그때의 나의 생명은 어떠할 것인가? 그것은 지금의 선택에 달렸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기로 결정할 것인가? 지금이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을 결정할 엄숙한 선택의 시간이 아닌가? 지금이 바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 28).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