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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건 이야기- (김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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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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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2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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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토록 나의 양심을 지켜 준 "양심수"란 호칭

김응태 목사는 1958년 입대하여 집총거부로 군사재판에서 징역 6개월의 징역형에 선고되어 복역했으며, 육군교도소를 출소 후 부산 제3육군병원의'대한 척추 수용사 희망회" 병동으로 차출되어 2년간 복무하였다.

= 글쓴이: 재미 한인재림교회 덴버한인교회 김응태 (약 20년전 신분)

★ 5명의 신앙 동지들과 헌병대 구치소를 거쳐 군법회의에서 6개월의 징역형에 선고

내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군으로 입대하던 날은 내 고향 내장산 단풍빛이 유난히 곱던 1958년 10월 20일이었다.

"얘야 ~ 몸조심해라. "

하며 목이 매이시던 어머님께 약한 아들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쏟아지는 눈물 대신간신히 미소를 보이고는 대기 중인 군용 열차에 몸을 던졌다.

정읍에서 논산이 지척인데 내가 탄 군용 열차는 마냥 늦장을 부리더니, 한밤 중이 되어서야겨우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날 저녁은 어떻게 지냈던지 기억이 없고 아침에 일어나니 해가 서쪽에서 붉게 치솟고있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군기를 잡느라 "앉아~!,  일어나~!, 앉아~!"를 거듭하던 3일 간의 보충대 시절을 거쳐배속받은 곳은 22년대 1대대 2중대였다.

훈련병 첫날은 무기를 지급받는 일로 시작되었다.

대검과 수통이 달린 허리띠를 던져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자 곧 대검은 빼어 놓고 수통만 달린 허리띠를 허리에 찼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무기를 지급하던 장교는 화가 난듯 거칠고 험악한 음성으로 착검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나를 어떻게 할수 없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된 듯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의 처음 믿음은 샛별처럼 빛나고있었기 때문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는 나의 양심의 소리를 어떤 위협도 잠재우지 못했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의 3일간은 내게 많은 갈등의 시간이었다.

중대장 오도식 대위는 인자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특히 상식 이상의 성서적 지식을 배경으로 한 그의 설득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다윗의 전쟁 이야기며 구약성경의 사사들이 어떻게 싸운 것과 모세가 아말렉을만나 싸운 이야기 등을 이끌어 우리 나라가 직면해 있는 현실을 설명하고 끊임 없이 나에게 집총을 권고했다.

그 순간마다 하나님은 내게 지혜를 주셨다.

"중대장님~! 전쟁이 어찌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까?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이 어찌 칼이나 창 때문이었겠습니까?

골리앗이 모독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윗은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비무장 전투원으로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결국 중대장 오 대위도 어쩔 수 없었던지 군수사관에 나를 이관하고 말았다.

나는 포박된 채로 특무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특무대에서는 군화의 끈과 허리띠를 풀게 하고 소지품을 압수한 후 나를 헌병대 구치소로 보냈다. 그때 나를 인솔하던 헌병이 조 하사였다고 기억된다.

조 하사는 이중 철조망 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여기 안식교 또 하나 들어왔다. "하고 고함치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그곳에는 조명묵, 오성기, 김관수, 박운동, 이경대, 임기성 등 6명의 동지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특무대에서 취조를 받는 중에 서로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명묵이 취조를 받고 있는데, 오성기 등 5명이 들어와 함께 취조를 받고 있었다.

때마침 삼육신학원에서 봉직하고 계시던 조명묵 형제의 아버지 조돈하 선생이 아들을 빼내시기 위해 이동규 특무대 감찰부장을 앞세웠다.

조명묵 형제는 시골에서 올라 온 5명의 동지들을 뒤에 남긴 채로 혼자 석방되고 싶지 않아서 모두 석방시켜 주지 않을 바에야 동지들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겠다며, 단호한 결심을 표했다고 한다.

상식적인 일이지만 구치소의 분위기는 거칠고 험하였다.

사람이 인간 취급은 고사하고 개, 돼지로 취급받는 곳이다.

그러나 앞서 온 동지들의 그리스도인적 감화는 구치소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특히 조명묵 형제의 뛰어난 기지는 감시병들을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엉덩이 한대 맞지 않고 한달 간의 구치소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다만 불결한 환경과 들끓는 '이'들에게 시달렸던 것만 기억에 남는다.

"이" 한두마리만 옷 솔기에 숨어 살아도 피가 나도록 긁을 만큼 가려운 것이 아닌가?~!

그런데 논산 훈련소 헌병대 구치소의 이들은 구 수가 헤어릴 수 없었다.

시루떡에 녹두 고물처럼 엉키고 엉켜 있는 이.....

지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구치소에 수감이 된지 약 한달만에 군법회의가 열렸다.

재판정에는 무연탄 난로가 활~활~ 타고 있었는데도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죄수들은 안타까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반대였다.

"주의 전의 한 날이 다른 곳의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시84:10) 값진 일이라 생각하니 어떤 처벌도 두렵지 않을뿐만 아니라 법관의 심문에 거침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아마도 법무관은 나의 그런 태도가 오만스러워 보였던지 재판이 끝난 뒤 재판석에서 내려와 구두발로 나의 정강이를 걷어차 상처를 입게 했다.

이날 내가 받은 형량은 "징역 6개월과 전체 급료 몰수"였다.

★ 당신이 양심수요?

부산 육군형무소 시설은 무척 배가 고프던 시절이었다.

밥덩이가 얼마나 작았던지 다야징(정제로 된 진통제)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부식이란 콩나물국이 주로 나오는데 한자 두치나 되게 긴 콩나물이 절기기는 얼마나 질기던지.. 마치 노끈을 씹는 것 같았다.

그것마져도 운이 좋아야 몇가락 차지되고 보통은 숫제 콩나물 삶은 멀건 물이 전부였다.

건빵 보급이 종종 나오는데 한 봉지가 3인 분이어서 세 사람이 나누어 먹어야 했다.

건빵 한봉지 속에는 보통 건빵 72개가 들어 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24알씩 나누면 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때로는 한개가 모자라든지~ 혹 한개가 더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곤란한 일이 벌어진다.

아무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남은 건빵을 잘게 부수어서 세 몫으로 나누어야 했다.

부스러기 하나라도 양보는 있을 수 없었다.

그점에 있어서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석방이 된다면 길모퉁이에서 구워 파는 풀빵이라도 실컷 사 먹어야지~!"이 한가지가 최대의 희망사항이었다면 배고픔의 정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것이다.

먹는 것이 시원찮으니 화장실로 가서 대변할 일이 없었다.

2주가 되어도 대변이 나오지 ㅇ낳더니 15일이 되는 날 처음으로 대변을 봤는데, 제사 상의 곶감 알처럼 생긴 것 두 덩이가 다였다.

너무도 배고차하고 있을 무렵에 희소식(?)이 있었다.

당시의 돈 500원이면 한달 동안 특식을 할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내게는 영치시켜둔 돈이 어느정도 있었다.

우리 동료 모두가 두 서너달은 특식으로 주림을 면할 수 있다.

물론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안식일교인들이 특식을 신청했단다."

이 소문이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중에 권 중위라는 키가 작지만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충고는 진실로 충격적이었다.

"너희들은 양심수들이다. 그런데 양심수들도 양심을 팔 수 있는 것이냐?

나는 너희들이 특식을 신청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너희들이 특식으로 배불러 있는 동안에 6000명의 배고픈 죄수들은 자기들의 작은 밥덩이에서 쌀 몇 알씩을 착취당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봤나??"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그말을 듣는 순간 쥐구멍을 찾아야 했다.

양심수가 양심을 속이고 있었다.

우리는 깊이 뉘우치고 배고픔의 고통을 6000명의 동료와 함께 나누기로 선택하고서야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40일 금식하신 후 세가지 시험을 받았다.

그때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셨다.

마귀는 마지막 시험으로 천하 만국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절하면 모두 주겠노라고 유혹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는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의 나와서 수종"(마4:11)들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똑같은 선으로 대접하셨다.

우리가 특식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바로 그 무렵 당시 영주동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시무하시던 반내현 목사께서는 군종 참모를 통하여 특별히 문회를 허락받고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두 차례씩 방문해 주셨다.

그때마다 많은 음식을 싸들고 오셨다.

생각해 보면 친부모라도 그렇게 할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른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처음 깨달아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딴에는 나도 나중에 그 어른같은 사랑의 사도가 되리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반내현 목사께서 오실 때는 예외 없이 동행하셨던 분들이 계셨다.

부산 영주동교회 여 집사들과 유을규 형님이셨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얼마나 배은 망덕한 사람인가?

"원한은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던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는 그 어른들에게 진 빚을 아직도 되돌리지 못한 채 수십 년의 세월이 물결 속에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이때부터 우리는 1959년 4월 18일 특사로 출감할 때까지 배고픔을 잊고 형기를 마칠 수 있었다.

★ 안식교 최고다.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해도 잔형을 다 치르지 않고 특사로 풀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연합회 군봉사부의 공로로 돌리고 싶다. 특히 연합회 군봉사부 담당 조영묵 목사의 헌신적인 노고를 높이 치하하고 싶다.

주영묵 목사께서는 우리에게 늘 희망적인 말씀만을 전하시는 평화의 사도였다.

우리가 영등포 삼 보충대 시절만 해도 "국방부 특명으로 수도 육군병원에 배속될 것"이라며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 배속된 곳은 수도 육군병원이 아니라 춘천 00보충대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직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수도 육군병원은 못가게 되었을 지라도 춘천 야전병원에 배속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무조건 믿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3일도 못되어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 일행 8명은 각각 두 사람씩 나뉘어 일선 부대에 배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충남 청양 출신 이경대 군과 함께 12사단으로 발령을 받아 200여명의 출감자 출신 군인들과 함께 군용 트럭에 분승되어 목적지 양구에 도착하니아침 6시경이었다.

이경대 군과 나는 난감할 뿐이었다.

수도 육군병원이나 춘천 야전병원에 배속되었다면 비무장 전투원으로 봉사할 수 있는  일차적인 보장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는 미련이 현실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던 군봉사부의 도움의 손길도 떠난 것 같았다.

다시 집총거부, 군법회의, 육군형무소라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인가?

앞이 캄캄해 왔다.

그때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기도할 수 있지 않는가?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는가?

다니엘이 위기의 때에 친구들과 함께 기도했던 것처럼 너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는가?

나는 동지 이경대를 데리고 숲속을 찾아가 간절히 기도한 후 보충대 중대장실을 노크했다.

"이등병 김응태 애로사항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자 중대장은 자리에 앉게 하더니 "애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믿음이 무엇인 것을 말했다.

그 신앙이 이유가 되어 육군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앞으로 배속될 부대의 성격에 따라서 악순환은 계속될 수 있을 것 같으니 사단 의무중대에 보내 주어 비무장 전투원으로  봉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중대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여기에서 한정된 기간동안 너희들을 보호하는 일 외에 아무 권한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자 나는 다시 사정했다.

"그것은 저희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대장님께서 오늘 사단 참모회의에 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대장님. 제발 저희들이 여기 있는 것을 알려 주시고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지? 연구해 보자고 제안해 주십시오."

중대장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이었다.

보충대 대기병들을 다 집합시켰다.

우리들이 부대 배치를 받는 날인 것이다.

이병 000 기갑부대, 상병 000포대...

한사람 한사람 호명이 될 때마다 더욱 초조해 갔다.

어느 부대로 배치될 것인가?

그런데 끝까지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았다.

그러더니 맨 마지막에 "김응태, 이경대 사단 의무중대~!"

이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큰 소리로 환호를 올렸다.

"안식교 최고다."

하나님의 승리였던 것이다.

★ 안식교 너는 속이지 않겠지?

12사단 의무중대로 배속은 받았지만 군대에서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훈련소의 훈련 경험은 다만 3일 간이고 그나마 집총을 거부하니 위병소 근무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취사반에 보내놓고 보면 안식일에 일을 못한다고 할 것이 뻔하다.

특무상사 김기주 인사계장은 난감해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안식교 너 거짓말 않겠지? 주보에서 근무해."

주보는 군대 안에 있는 구내매점이다.

이기화라는 마음 좋은 경상도 사나이가 주보장이고 나는 그를 돕도록 되었다.

주보에서 근무하다 보니 집총 문제가 해결되고 안식일도 별로 신경을 쓸 필요없이 지킬 수 있었다. 주보장 이 하사는 나를 선택해 주었다.

내가 안식일교인임을 알고 안식일에 사역병 집합이 있을 때는 선임자인 자기가 나를 대신하여 사역을 하면서 나에게 많은 편의를 도모해 주었다.

주모에서 근무한 지도 반년이 지나고 보니 그 분야에 대하여 꽤 익숙해졌고 알 필요가 없는 부분도 알게 되었다.

그 숱하에 들어오는 이익금의 대부분이 빠져나가는 길이 너무 넓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던 어느날 휴가 명령을 받았다.

13개월만에 고향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모처럼만의 귀하인데 빈손으로 갈 수야 없지.

휴가비 250원으로는 천안역의 퉁퉁 불은 우동 한그릇 값에 불과할 텐데...

그래 좋은 수가 있잖아.

금고의 열쇠가 내게 있는데 000도 그 금고의 돈을 자기것 마냥 쓰는데 나는 쓰면 안 되나??"  

유혹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담대히 금고를 열고 500원 짜리 한 장을 꺼내드는 순간 인사계장 김기주 상사의 말이 떠올랐다.

"안식교 너는 속이지 않겠지?~!"

아마도 성령의 음성이었으리라..

그 마음의 소리에 압도된 나의 손과 마음은 겉잡을 수 없이 떨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돈을 제 자리에 집어놓고 무릎을 꿇었다.

"주님. 부끄럽습니다. 양심을 지키며 살겠다는 것이 위선이었군요.

용서하여 주세요. 주님 앞에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게 해 주세요."

기도를 드리고 나서 평화를 되찾았다.

잠시 후에 이 하사가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김일병. 너 내일 휴가가지. 여비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하면서 금고를 열더니 집히는대로 듬뿍 용돈을 주어 휴가를 잘 갔다가 올 수 있었다.

★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경대 군은 논산 헌병대 구치소에서 처음 만난 이후 줄곧 군대 생활을 같이 했다.

12사단 의무 중대에서 연대 의무 중대로 전속이 될 때도 같이 왔다.

부대 주변에 우리 재림교회가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부대 밖에 나가 예배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그대신 의무 중대장의 배려로 안식일에는 하사관 막사가 우리의 예배당이 되었다.

막사 주변에서는 상급자들이 내부사열 준비에 땀을 흘리고 있는 찬미를 부르고 예배한다는 것이 오히려 쑥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방해받지 않고 안식일을 성별할 수 있었던 것을 우리의 특권이었다.

그 나름대로 불편없이 군대생활을 하고 있었다.

계급도 상등병이어서 막사 안의 잔심부름꾼 신세도 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육군 본부의 특명으로 부산 제3육군 병원으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소위 안식일 교인들에게 비무장 전투원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주는 특혜였다.

우리가 부산 육군병언에 도착해 보니 이미 제1차로 수십 명이 선발되어 와 있었고 우리는 제2차로 차출되어 간 것이었다.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반외과 병동에서 척추환자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여기서 만난 사람이 밴드 교지의 영웅 김만술 중위다.

김만술 중위는 사병 출신이다. 그의 부대가 중공군에게 거의 섬멸되고 그의 소대장도 전사하였다. 그러자 상부에서는 김만술 상사를 즉시 소위로 임관시켜 밴드 고지를 사수하게 했다.

밤중쯤 되자 중공군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김 소위는 소대 전 병령을 사면으로 이동시키며 집중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전투는 동이 트면서 그쳤고, 그 전투에서 중공군 1개 연대를 섬멸한 공으로 배트 고지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거친 성격은 그에게 불행의 씨가 되었다.

아마도 그는 그의 무공훈장을 앞세우고 자만에 빠졌던 것 같다.

그가 부대 막사를 짓는다는 이유로 허가없이 도벌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신문기자들의 취재 대상이 된 것 같다.

그는 그들을 귀찮은 존재들이라며 얕잡아보고 두들겨 패 주었다.

세상에 어떤 천치가 있어서 억울하게 맞고만 있었겠는가?

신문기자들이 앙갚음하려고 깡패들을 동원시켰고 김 중위는 깡패들의 집단 폭행을 피하려고 뒷걸음질 치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척추환자가 되었다.

그의 일과는 OB맥주를 마시는 일로 시작된다.

취하도록 마시고 취하면 시비하고 깡을 부렸다.

그리고 밤 열두시 경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유행가를 혀 꼬부라진 음성으로 푸념하면서 하염 없이 운다.

내가 왜 그 희망을 잃은 영혼에게 소망의 그리스도를 손개하지 못했을까?

지금도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로 남았다.

★ 의용촌 시절의 노방전도팀

의용촌은 척추환자의 집단 거주지로서 부산의 범일동 산비탈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에서 위생병인 나의 임무는 김 하사를 24시간 대기 보호하는 일이었다.

환자들이 거주하는 곳은 방 둘에 부엌 하나의 간단한 구조로 된 집이었다.

방 하나는 환자 부부가 쓰고 다른 방은 위생병이 기거하면서 환자를 돌보게 되었다.

이곳에서 생활은 군복무 같지 않았다. 시간이 많았고 제재받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때 나를 따라 웅변 연습을 하던 몇사람 중에 김관수, 이인중, 이의중, 윤종진 들이 포함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단련시킨 담력으로 전철안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

범일동에서 초량역까지 소요되는 30여분 동안 전철에서 흔들거리면서 입에 거품을 뿜어내던 그 전도열이 지금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 분위기는 당시 영주동교회 출석하던 60여명의 현역군으로 구성된 청년선교회에 사업 목표로 이루어졌다. 우리들은 용두동 공원, 부산역 광장, 시장 골목 등을 겁 없이 외치고 다녔다.

한번은 시장 골목에서 노방전도를 하려는데 서서 말할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다.

마침 빈 사과 상자가 보이기에 주인의 양해 아래 그것들을 쌓아 임시 단을 만들고 올라가 한참 열변을 토하다가 사과 상자가 무너지는 바람에 넘어졌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즐거웠던 추억의 하나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부산 영주동교회에서는 많은 사랑의 빚이 있다.

육군형무소 시절이나 제3육군병원 시절을 통하여 너무도 많은 은헤를 입었다.

당시 시무하시던 반내현 목사 내외분과 후임으로 계셨던 권숙련 목사 내외분,

그리고 수석장로 조만복, 권순애 수석 집사 등을 위시해서 모든 교우들이 초인간적인 사랑과 인내로써 우리 60-70여명의 군인들을 선대하여 주셨기에  그 교회 위에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은총이 영원하시기 바란다.

★ 김병장 '장가' 가야겠어.

1961년 여름이었다.

내가 돌보고 있는 환자 김 하사의 어머니가 아들의 집에 다니러 왔다.

그녀가 5살된 막둥 아들을 데리고 왔던 것을 생각하면 45-50세 정도일 것이라고 짐작되는  키가 크고 건장한 여자였다.

그의 남편은 중풍으로 3년째 거동이 불편하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이 되자 잠자리가 불편하여 다른 동료 집에 가서 자고 오겠다는 말을 했더니 환자가 "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환자의 어머니도 "위생병이 환자의 곁을 떠나면 안 되지"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환자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 또래이고 거기에는 다행히 꼬마 아이도 있어서 별 일은 없을 것으로 믿고 같은 방을 쓰기로 작정했다.

몇일밤은 별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나는 그녀로부터 기습을 당했다.

숨이 답답하여 잠을 깨고 보니 그 여자가 담대히 내 입을 빨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이미 반쯤 벗고 있었고 그녀의 손은 어느내 내 사타구니에 들어와 아래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 25세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분위기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나도 본능의 종이 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면서 "김 병장 장가가야 겠는데.."라고 속삭이며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은 다시 이 위기의 순간에 나의 순결을 지켜 주셨다.

"응태야. 너는 양심수이다. 양심에 상처를 낼 수는 없잖아. 요셉을 생각하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창39:9)하였겠는가?"

그녀는 보디발의 아내 같은 여인이었다.

낮에는 뻔뻔스럽게 곱지도 않는 얼굴로 히죽히죽 웃으며 나에게 계란도 삶아 주고 별미도 만들어 주며 호감을 사려 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음식이 맛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다시 밤이 되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밤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도 감히 또 그렇겠는가?"

그러나 그실낱같은 기대는 무너졌다.

그녀는 상습적이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창 39:10), 나도 요셉의 지혜를 배워야 했었기에 환자의 양해도 없이 외박을 하였다.

만약 이때의 유혹에 넘어졌었다면 내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마귀의 자식으로 전락했겠지.

생각할수록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평생을 살면서 숱한 유혹을 만났다.

양심을 팔아야 할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지켜 주었던 것은 "양심수"로서의 부산 육군형무소의 경험이다.

그 경험은 짧았지만 그것은 나의 긴 인생을 구부러짐 없이 곧게 살도록 지켜준 나침반으로 남아있다. 나는 그 특수한 환경에서 북음의 사도가 되었던 하평장 형제 등을 아끼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셨다.

나의 짧은 "양심수"로서의 특별한 경험은 내 자신의 영혼을 건져주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끝>

김응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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