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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먹게 된 된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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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admin
Date
2025-02-13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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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먹게 된 된장국

미국에서 온 의료진 17명이 평양 순안 비행장에 내려 한동안 기다리게 되었던 날은 2006년 5월 3일이었다. 대부분이 초행인지라 모두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고 잠시 머물게 되리라는 기내 안내방송은 오히려 불안한 마음을 더욱 끌어 올렸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창밖으로 보이는 “평양순안비행장”이란 글자가 북한에 온 사실을 확인해 주는 순간 이번 여행을 반대하던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윽고 탑승객들이 나가는 모습이 보였고 별 문제 없이 우리 일행도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터미널을 향해 약 2,3분 정도 걸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은 북한 외무성 산하 “해외동포위원회”소속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면서 앞으로 우리가 머무는 동안 안내를 맡은 것에 대해 본인들의 소개가 있었다. 곧 승합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양시내 “고려호텔”. 방 배정과 룸메이트가 정해져 나는 23층 25호실에 시카고에서 온 닥터 고와 한방을 쓰게 되어 어둑 컴컴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23층에서 내려 방 번호를 찾는데 복도 역시 어두워서 쉽지 않았다. 방안에 들어오니 다소 안정감을 느끼는 듯했지만, 우린 조심스레 창밖을 두리번 거리며 평양시내를 내다보면서 그러나 아직도 불안과 걱정스런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하면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다시 호텔 로비로 모인 일행은 조금 전 만났던 안내원들과 정식인사를 나누고 평양 일정에 대한 설명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조금 전보다 한결 분위가 부드러워지면서 평양이 먼 곳이 아니라 서울에서 불과 3시간 거리에 있다는 현실을 의식하며 평양에서의 첫 밤을 맞이했다

대부분의 일정이 오전은 “평양과학의학학술회의” 그리고 오후에는 병원이나 의료시설(결핵요양소, 암센터, 치과재료공장 등등)을 방문하는 것이다 보니 주로 시내를 돌며 간간이 북한 명소들(능라도 경기장, 모란봉과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변에 묶여있는 푸에블러 미군 함정 등등)도 보면서 관광까지 겸하는 스케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따라다니는 북한 안내원들과 근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또 많은 경우 점심까지 함께 하게 되며 하루 이틀 지나자 아직도 낯설기는 했지만 그래도 첫날보다는 매우 달라진 분위기 속에 일정이 진행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내원 중 한 사람 S와 마주 보며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메뉴판에서 내가 좋아하는 “된장국”요리를 주문했더니, 그 안내원 친구도 똑같은 것을 주문하면서 우린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 기회를 느끼게 되는데... 미국에 이민 와서 처음 만난 미국인과 사귀는데 3년 이상이 걸리는 시간을 단 3분도 채 안되는 짧은 만남 속에서 친분을 나누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안내원은 우리 의사들이 맛있다고 그릇을 다 비우는 동안 밥을 다 먹지 못하고 식당을 나오는 모습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그날따라 마침 자동차 내 옆자리에 앉게 되어서 조심스레 나의 직업본능을 발휘해 가며 밥을 다 먹지 못하고 일어서는 이 안내원의 이유를 알아냈다.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위 어금니 2개와 왼쪽 아래 어금니 3개를 잃어 음식을 먹을 때 잘 저작할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3일 뒤에 알게 되었다. S는 내게 자신의 치아가 엉망이란 말만 했다.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잃어버린 치아를 복구시켜 줄 수 있는 방법 중 몇가지: 1. 치아이식, 2. 브리지, 3. 부분 틀니로 생각이 되어 그중 가장 현실적인 것은 3. 부분 틀니(partial dentures)로 생각되어 그 생각을 S에게 전하니 매우 주저주저하며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것을 정말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는 눈치였다. 물론 나도 30여년의 의사경험 중 이러한 경우는 없었다. 이와 같은 치료는 최소한 30일은 필요한데 그렇다고 평양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입장도 못되고...

그래서 생각난 것이 환자의 구강 상태를 본(impression)을 떠서 석고(stone)를 만들어 미국에 가져갈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틀니 만드는 것은 일상 하는 일이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환자의 구강상태를 본뜨는 일과 석고를 부어 stone을 어떻게 민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평양과학의학학술”회의에서 만난 북한치과의사에게 부탁하기로 하고 그에게 나의 생각과 계획을 말했더니, 그 치과의사는 난감한 표정이다. 그래도 나의 지속된 설명과 자신감에 감동이 되었던지 S군을 만나 다음 날 아침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찾아올 것을 듣게 된다. 그리고 바로 출국 전 날 S를 도와준 그 치과의사로부터 묵직한 박스를 하나 전달 받았는데 박스를 열어보니 내가 부탁한 대로 환자의 구강상태를 그대로 복원시킨 석고가 들어 있었고... 그래서 살펴보니 S는 오른쪽 위(2개)와 왼쪽 아래(3개) 어금니가 부족한 상태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의료진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그 맛있는 된장국도 비빔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먹는둥 마는둥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박스를 귀국짐에 넣지 않고 손에 들고 오다가 북경공항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는데, 세관원이 내가 손에 들고 오는 박스를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아차하면서 걱정이 된 것은 틀니 만드는 재료를 북한에서 얻어 온 것이 문제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틀니를 만들려면 일반적으로 분홍색 가루를 특수 액체에 섞어서 환자의 구강 상태에 따라 잃어버린 치아를 보충해 넣고 모양을 만들어 몇 분 안에 응고시킨 뒤 그것을 잘 손질하고 다듬어서 환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액체(liquid)의 휘발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솔린보다 훨씬 더 높아서 미국에서도 항상 취급주의가 요구되는 치과재료중 하나다. 그런데 이 세관원이 그 액체를 자기가 쓰던 잿더리에 따라 붓더니 설합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당기자 펑하는 작은 폭발음과 함께 순간 그 잿더리는 불덩이가 되어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나는 불법 소지물을 갖고 여행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담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중국세관원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자니 등에서 땀만 흐르고 우리 일행들은 비행기 컨낵션으로 더 이상 기다릴수 없게 되고... 정말로 진퇴양난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옥신각신 끝에 그 세관원에게 그의 상사(supervisor)와의 대화를 요청했다. 조금 기다리니 자신이 supervisor라며 젊은 세관원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그는 대화가 가능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나는 이 책임자에게 나의 신분과 그리고 북한에서 있었던 일 중 한 불쌍한 환자를 알게 되어 그를 도와주려는 차원에서 불법적인 것도 모른 채 그 액체를 받아 가지고 오게 된 경위 등등을 말하니 순간 그는 미소를 지으며 “You are a good person. Don’t worry about it!”. 그리고 나의 조그만 상자를 보통 사이즈보다 훨씬 큰 상자에 넣어 미국까지 무사히 오게 해 주었다.

미국에 오자마자 내가 이용하는 기공소 소장과 통화를 하면서 지금 보내는 케이스는 환자 없이 부분틀니를 만들게 되며 2셋트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환자의 경우 4-5번의 병원 약속을 하면서 환자의 입안에서 잘 맞는지 또 말은 제대로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음식은 잘 저작할 수 있는지 등등을 살피면서 최종 틀니를 만든다. 그런데 이 케이스는 나의 상상속에서 모든 절차가 진행되어야 했고 마침내 2세트의 아래 및 위의 부분틀니가 완성되어 북에 있는 S에게 전달 과정만 기다리게 되었는데 평양을 떠나기 전 공항에 배웅 나왔던 S와 그 문제를 LA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L의사 편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말로 작별의 인사를 했었다.

그 후 2달 쯤 지난 어느날 L의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평양을 다녀온 그분 소식의 첫 마디에 귀를 기우렸다. “평양에서 난리가 났었어! Dr.남이 만든 틀니가 환자에게 너무나도 잘 맞아서...”

전화가를 잡은 내 손이 떨리며 순간 나의 작은 마음을 도와주신 보이지 않는 하늘 손에 깊은 감사를 드린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 고유의 된장국을 함께 먹다 보니 70년 이상 단절되었던 민족의 분단도 또 민족 동질성의 일부도 잠시 회복되는 순간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추억 중의 하나다.\

글 남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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