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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여한가(餘恨歌)

Author
church admin
Date
2024-04-16 03:28
Views
23





쇠락하는 양반 댁의 맏딸로 태어나서


반듯하고 조순하게 가풍을 익혔는데


일도 많은 종갓집 맏며느리 낙인찍혀


열 여덟 살 꽃 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 세 살씩 터울 두고 일곱 남매 기르느라




철 지나고 해 가는 줄 모르는 채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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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콩을 갈아 두부 쑤고, 메주 띄워 장 담그고


땡감 따서 곶감 치고, 배추 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 육포 유밀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 높이 간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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찹쌀 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 박아 제일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 술로 떠낸 다음


청수 붓고 휘휘 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 일 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 걸고 소주 내려 묻어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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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나온 권속들이 스무명은 족한데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살림 도맡아서


보리쌀 절구질 해 연기로 삶아 건져


밥 짓고 국도 끓여 두번 세번 차려내고


늦은 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 풀솜 천근처럼 무거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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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날줄을 갈라 늘여 베틀 위에 걸어놓고


눈물 한숨 졸음 섞어 씨줄을 다져 넣어


한 치 두 치 늘어나서 무명 한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 내려 삶아내서




햇볕에 바래기를 열두 번은 족히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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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 한 번 마음놓고 토해보지 못한 신세


졸고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 꿰어


무거운 눈 올려 뜨고 한 뜸 두 뜸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 끝이 손톱 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 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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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들 헤진 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수발 어찌 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고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 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 안차


맵고 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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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침해진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가득


차 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녀석 세워 안아 놋쇠요강 들이대고


어르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 시키면


일할 엄두 사라지고 한숨이 절로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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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식 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봉사 제사는 여나무번 족히 되고


정월 한식 단오 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해도 거들사람 하나 없고


여자라곤 상전 같은 시어머니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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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 매워라.


큰 아들이 장가들면 이 고생을 면할 건가?


무정스런 세월가면 이 신세가 나아질까?


이 내 몸이 죽어져야 이 고생이 끝나려나?


그러고도 남는 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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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 없이


어느 틈에 자랐는지 짝을 채워 살림나고


산비둘기 한쌍 같이 영감하고 둘만 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


지지리도 복이 없는 내 마지막 소원인데


마음고생 팔자라서 그마저도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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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별채 육간 대청 휑 하니 넓은 집에


가문 날에 콩 나듯이 찾아오는 손주 녀석


어렸을 적 애비 모습 그린 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 짧은 제 어미를 탁했는지


곶감 대추 유과 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 주어볼 틈도 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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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나 큰 일 때 객지 사는 자식들이


어린것들 앞세우고 하나 둘씩 모여들면


절간 같던 집안에서 웃음꽃이 살아나고


하루 이틀 묵었다가 제집으로 돌아갈 땐


푸성귀에 마른나물, 간장, 된장, 양념까지


있는 대로 퍼 주어도 더 못주어 한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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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발톱 길 새 없이 자식들을 거둔 것이


허리 굽고 늙어지면 효도 보려 한거드냐?


속절없는 내 한평생 영화 보려 한거드냐?


꿈에라도 그런 것은 상상조차 아니했고,


고목 나무 껍질 같은 두손 모아 비는 것이


내 신세는 접어두고 자식걱정 때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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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 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 채비 늦기 전에 해두려고


때깔 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 든해 손 없는 날 대청 위에 펼쳐놓고


도포 원삼 과두 장매 상두꾼들 행전까지


두 늙은이 수의 일습 내 손으로 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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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죽고 나면 그 수발을 누가 들꼬




제발 덕분 비는 것은 내가 오래 사는 거라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틈에 칠순 팔순





눈 어둡고 귀 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자식은 중늙은이 되어가고


까탈스런 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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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같은 자식들아 나죽거든 울지 마라!


인생이란 허무한 것 이렇게 늙는 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평생을 살았구나!

 



원도 한도 난 모른다 이 세상에 미련 없다.



서산마루 해 지듯이 새벽 별빛 바래듯이



잦아들 듯 스러지듯 흔적없이 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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